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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뭔데?(야고보서 4:11-12)
최영모 [beryoza]   2019-09-15 오후 9:25:27 190

설교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같은 본문으로 했던 설교 <더러운 상자 속에 보낸 선물>이 본문의 의도와는 정확하지 않아서 다시 하였습니다. 새삼 설교자는 성경연구를 신중하고도 철저하게 해야함을 깨닫습니다.

네가 뭔데?(야고보서 4:11-12)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명절 연휴에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북쪽 나라에서 보면 보름달이 한국보다 훨씬 크게 보입니다. 풍성한 보름달이 여러분에게도 풍성한 느낌으로 다가오길 바랍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2주 전에 설교한 본문인데, 오늘 다시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 한 설교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형제간에, 즉 믿는 사람들 간에 서로 비난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날 저는 단지 비난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그 부분을 읽으니까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야고보는 형제끼리비난하거나 헐뜯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물론 일반적인 비난에 대해서 성경 다른 곳에서는 많이 언급하고 있지만, 하여간 오늘 이 본문은 같은 신자끼리, 형제자매끼리 헐뜯거나 심판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오늘 다시 이 본문을 정하였습니다.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는 예수의 동생이면서 목회자입니다. 그가 목회하면서 보니까 교회 안에는 서로 헐뜯고 심판하는 일이 많은 거예요.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다른 형제를 비난하고 심판하는 것이 매우 큰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에 형제를 비난하거나 심판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왜 형제를 비난하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일까요? 왜 비난하지 말라고 하는 걸까요?

 

1. 첫째 이유는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11절 한 절에는 우리 성경에는 형제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지만, 원어 성경에 보면 이 형제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형제 여러분, 서로 형제를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이렇게 세 번 나와요. 짧은 한마디에 무려 세 번이나 형제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이 단어가 무겁고 중요하다는 거예요. (새번역에는 성차별을 없애기 위하여 형제를 형제자매로 번역했지만, 원래 단어는 형제입니다)

종종 형제끼리 싸우는 것이 언론에 비칠 때가 있어요. 며칠 전에도 신문에 보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들어온 조의금을 놓고 시누이와 올케가 서로 싸움이 붙었어요. 폭행과 함께 재판까지 가고 했는데, 이유를 떠나서 보기에 좋지 않아요. 부모가 볼 때도 자녀들끼리 서로 비난하고 싸우는 것은 참 괴로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놀라운 일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한 형제자매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끼리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하면서 다른 형제를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그래서 형제끼리 헐뜯거나 심판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는 그 말씀에 그다지 잘 순종한 편은 못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가 누구냐 하는 문제로 서로 비난하고 헐뜯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예수는 인간이라고 하였고, 다른 쪽에서는 신이라고 하였으며, 또 다른 쪽에서는 인간인 동시에 신이라고 하면서 서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제가 치열하게라는 표현을 한 이유는 자기네와 의견이 다르면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심지어 상대방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죽였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고 비난하고 죽이고 했어요.

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나누어졌습니까? 아니에요. 처음에는 하나였는데, 역사가 흘러오면서 분열된 것입니다.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뒤에 서방교회는 다시 천주교라고도 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라고도 하는 개신교로 분열이 되었어요. 그래서 지상에 있는 교회는 크게 러시아에서 많이 보는 정교회가 있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있으며, 우리가 속한 개신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회 안에만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루터교, 구세군, 침례교, 순복음교회 등 여러 교회로 분열이 되어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에 있는 장로교회는 또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어요.

그러면 분열이 될 때, ‘당신의 생각도 매우 일리가 있고 합리적이며 타당합니다. 그런데 우리 서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 차이가 있으니 서로가 존중하되 모임은 나누어서 합시다하였을까요? 아니에요. 서로가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고 비난하고 심판하면서 분열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속한 교회만이 옳다는 것이었어요.

지금도 어떤 이들은 자기 교파가 가장 올바르고 정통이라고 주장합니다. 정교회라는 말도 정통교회라는 뜻입니다. 내 교파 만이 진리이고, 성경에 가장 맞는 교회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이 상당히 많아요. 그래서 그런 상황을 빗대어 말한 유머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자살하려고 마포대교 난간에 올라갔습니다(투신자살 수가 가장 많은 다리는 마포대교래요).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보았어요. 황급하게 그 사람을 붙잡으며 말합니다.

제발 죽지 마세요. 아직 소중한 것이 많이 남아 있어요.”

뭐가 소중하다는 거죠?”

당신은 종교가 있습니까?”

. 기독교입니다

나와 같군요. 개신교인가요 천주교인가요, 정교회인가요?”

개신교입니다.”

나와 같군요. 그러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어디에 속하나요.”

나는 장로교회에 나갔어요.”

나와 같군요. 그러면 예수교장로회인가요, 아니면 기독교장로회인가요?”

우리 교회는 예수교장로회인데요.”

나와 같군요. 그럼 통합, 합동, 고신, 대신 개혁, 어디에 속하시나요?”

우리 목사님이 통합이라고 그러던데요.”

그러자 말리던 사람이 당신은 자유주의자이자 이단이네요. 그냥 죽어버리세요.” 하고는 그 사람을 다리에서 밀어버렸답니다.

조크니까 너무 심각하게 듣지는 마세요. 하여간 자기 교파가 진리이고 다른 교파는 틀렸다고 정죄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처음 만날 때부터 교파가 어디냐 하고 묻고 확인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이곳에 있는 영락교회도, 미르교회도, 은혜교회도 모두 형제입니다. 그들을 비난할 필요가 없고,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서로가 잘되어야 하는 거예요.

 

2.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고 한 둘째 이유는 형제를 심판하는 것은 곧 율법을 심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잘못된 선입관이 있는데, 율법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바울이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한 까닭에 그런 오해가 생긴 거예요. 마태복음에서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어요. 율법이라는 단어를 계명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보세요. 그러면 거부감이 훨씬 덜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심판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계명을 심판하는 것이 된다는 거예요.

한국에서 사역할 때였어요. 한국을 방문한 외국 목사님 10명을 위하여 관광 안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창덕궁을 거닐다가 잠시 나무의 그늘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목사님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어요(사진을 보세요). 그 모습이 좀 특이하여 제가 옆에서 살짝 사진을 찍었어요. 찰칵 소리가 들리니까 그분이 깜짝 놀라서 저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한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나라에서는 기독교인이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 했더니 그래도 된다는 거예요. 하지만 술은 금한답니다. 이처럼 어떤 문화에서는 담배는 괜찮지만, 술은 금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화에서는 반대로 담배는 금하지만, 술은 괜찮습니다. 둘 다 금하는 문화도 있고, 둘 다 허용하는 문화도 있습니다.

사진 하나를 더 볼까요? 이것은 제가 독일 공항에서 산 인형입니다. 보세요. 성경책을 들고 있는 목사님이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어요. 무엇을 의미할까요? 담배나 술은 나라와 문화에 따라서 금하기도 하고 허락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은 지키면 천국 가고, 지키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단지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형제를 이렇게 심판합니다. “저 집사는 술 담배를 하거든. 그러니 죄를 짓고 있는 거야.” 그 사람이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연약함과 고통은 이해하지 못한 채 심판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정의, 자비, 신의는 외면해 버린 채, 우리는 율법의 심판자로 나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위선을 부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은 십일조는 잘 드리면서 의와 인과 신, 즉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버렸다고 책망하셨어요(23:23).

그런가 하면 교리의 차이를 갖고 심판하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교회의 교리도 맞을 수 있어요. 그런데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심판하고 정죄하는데, 그럴 때 우리는 스스로 율법의 심판자가 된다고 오늘 성경은 지적하고 있어요.

어느 교회에서는 여자는 안수를 받을 수 없다, 즉 목사나 장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교회에서는 여자도 얼마든지 목사나 장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교회는 상대방이 성경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는 상대방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고 비난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주일 아침에 친구와 함께 교회에 가는 길에 가게에 들렀어요. 과자를 하나 사고서 가게 문을 막 나서는 순간, 지나가던 주일학교 부감 집사님하고 눈이 마주쳤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무슨 큰 죄를 짓다가 들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느냐 하면 신자는 주일에는 돈을 써서는 안 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어긴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일에 돈을 주고 과자를 사 먹으면 죄를 짓는 거예요. 그렇게 배우고 교육을 받았던 터라, 주일에 돈으로 과자를 샀으니 큰 죄를 짓다가 들킨 거예요.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되고, 심지어 그 집사님 이름까지도 잊지 못합니다.

WCC는 세계교회협의회를 일컫는 말입니다. 6년 전에(2013) 한국에서 WCC 총회가 열렸습니다. 한쪽에서는 대회를 치르느라 온갖 노력을 하였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대회를 방해하느라 온갖 노력을 하였습니다. 같은 형제끼리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대회가 진행되는 곳에 와서 피켓을 들고 시위까지 하였어요.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모두 자기들이 진리이며 상대방은 틀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절대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유연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를 때 자칫하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반대하면서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습니다. 절대적이지 않은 일은 모두 사소한 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이단이나 잘못된 교리까지도 다 수용해야 하나요 하고 반문하실 수 있을 거예요. 교인 중에는 사기 치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데, 그런 것까지 용납하면서 참아야 하는가요 하고 물어보실 수 있어요. 그런 경우는 바울이 말한 것이 좋은 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그들이 음행하는 사람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교회를 책망하였습니다(고전 5:1-5). 명백한 잘못을 그냥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울의 책망을 들은 고린도 교회는 음행하는 사람을 징계하였습니다.

그 뒤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다시 보낸 편지에서는 징계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고 또 책망하였습니다(고후 2:6-8).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요? 책망하라는 말인가요, 하지 말라는 말인가요? 저를 한 번 따라 해보세요. “바울은 종종 오락가락한다.”

사실은 바울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명백한 잘못은 징계하고 벌을 내리되, 그다음에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징계한 후에는 사랑을 보여주어야만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징계하는 것으로만 끝나버리면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니까 고린도 교회는 징계하는 것까지만 하고, 이어서 해야 하는 용서와 사랑은 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보낸 편지에서는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고 책망을 했던 거예요. 이처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다면 징계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셋째 이유는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게 되면 율법을 헐뜯고 심판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는 교만의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의 부끄러운 경험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청년 시절, 교회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하도 방방 뜨면서 설치고 다니니까 아직 결혼하지 않았지만, 집사로 임명을 받았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였지만, 스스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감당하지 못하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불만스러웠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 불만스럽고, 목사님이 불만스럽고, 이것저것 다 불만스러웠기에 교회를 떠났어요. 그리고 그런 눈으로 보니까 만족할만한 교회가 없었어요. 그러면서 가나안 교인이 되어 홀로 방황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재수를 하면서 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원 선생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어요. 단지 선생님의 강의만 들었지만, 제 눈에는 그 선생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보였어요. 기독교인 눈에는 기독교인이 보입니다. 소매치기 눈에는 다른 소매치기가 보이는 이치와 같은 거예요. 딱 보니까 선생님이 신실해 보이는 크리스천이었기에 제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대한 문제점, 목사님에 대한 문제점을 마구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네가 뭔데 교회를 비난하고 목사님을 비난하느냐?”

다른 말은 다 들어오지 않았는데, ‘네가 뭔데라는 말은 굉장히 강하게 저에게 울렸습니다. ‘네가 뭔데?’라는 말에 제가 크게 깨닫고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회개하고 돌아서니까 세상이 새로워 보였어요. 무관심했던 사람들도 사랑스럽게 여겨지고, 숨 쉴 때는 공기도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전에 비판하던 것들이 다 이해가 되고 좋게 보이는 거예요. 환경이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내가 회개하고 내가 바뀌니까 모든 것이 새로워 보입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던 거에요.

우리는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지 심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계명대로 살려고 노력할 뿐이지, 다른 형제들을 심판할 자격은 없어요. 형제를 자주 심판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인 4:10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여지라고 하였어요. 그리고 이어서 겸손한 사람이 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형제를 헐뜯거나 심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뭔데 형제를 심판하느냐고 야고보만 말한 것이 아니라,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14:4a)

그러나 형제를 심판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해서 바로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내 눈으로 볼 때는 한심하고 어리석으며 나쁜 사람처럼 보여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심판하거나 헐뜯는 데 조금은 머뭇거릴 것입니다. 내가 믿는 교리를 굳게 확신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믿는 교리에도 마음의 문을 열어놓는 것은 지혜라는 사실을 안다면 형제를 심판하는 데 조금은 주저할 것입니다. 나는 피조물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한순간도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감사하며 산다면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형제를 심판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모두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합시다. 내가 다른 형제자매를 정죄하고 심판하고 있다면 주님, 나의 교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겸손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나를 도와주셔서 형제를 심판하는 교만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잠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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