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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상자 속에 보낸 선물(야고보서 4:11-12)
최영모 [beryoza]   2019-09-02 오전 1:57:29 205

더러운 상자 속에 보낸 선물(야고보서 4:11-12)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연합예배로 쉬었던 야고보서를 오늘부터 다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야고보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 혹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두 구절이며, 주제도 분명합니다. 남에 대하여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 말은 건전한 의미에서의 비판이 아니라, 왜곡된 의도를 갖고 험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비난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것 같아요. 장관 임명에 대하여 반대와 찬성의 의견들이 서로 충돌하고 분열하면서 한국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후보자에 대한 많은 비난을 보면서 저는 내가 만일 인사청문회의 대상자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모르게 위반했던 것들이 많았기에, 이것 하나만 갖고도 목사라는 직분은 내려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가 말한 대로, 설교한 대로 살지도 못합니다. 말로는 기도하라, 사랑하라, (오늘도 험담하지 말라고 설교하겠지만), 그렇게 설교하면서도 나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들은 외국 유학을 했고, 병역은 몇 년째 연기한 상태에 있는 등,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청문위원들의 공격은 매우 거셀 것 같아요. 결론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저 역시 설교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누구도 하루라도 피해갈 수 없는 죄로 세 가지를 꼽습니다. 음탕한 생각, 자신의 기도에 하나님이 즉시 응답해주리라는 기대, 그리고 험담입니다. (조셉 텔루슈킨 <승자의 율법> 243) 이 말은 험담이 죄이지만, 모두가, 그것도 매일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험담은 우리와 가까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험담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일본인 교수 사이토 이사무는 <사람은 왜 험담을 할까>라는 책에서 험담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요즘 ‘NO JAPAN’이라고 하여 일본상품 불매 운동이 벌어지는 상황인데, 일본 책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로 일본과는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현 상황에서 일본은 다 나쁘다고 비난하기보다는 아베와 그의 정권으로 초점을 맞추어 비난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 내에서도 아베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이 상당히 있어서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여러모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다 나쁘다고 하면 아베의 비판 세력까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설교의 주제는 비난하지 말자는 것인데도 아베를 비난하자는 이 모순이 오늘 설교의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사실 아베라는 단어는 참 좋은 말입니다. ‘아베 마리아’, 얼마나 좋아요

하여간 사이토 이사무 교수의 책은 험담은 나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차라리 험담을 제대로 하고 제대로 듣자이런 관점에서 험담의 실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지요. 험담에 대하여 매우 현실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험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어떤 억압이나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하는 험담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렇게라도 하여야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험담의 또 다른 하나는 나와 그다지 상관이 없는데도 부정적으로 보고 비난하고 헐뜻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험담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세 사람을 죽인다고 합니다. 험담하는 사람 본인과 험담을 듣고 있는 사람과 험담의 대상자 모두에게 안 좋아요.

우리가 손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 다른 손가락 세 개는 나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쁘다고 할 때 나는 세 배로 나쁘다는 거예요. 반대로 저 사람이 좋다고 할 때도 나는 세 배로 좋다는 거예요. 아래로 향하는 남은 손가락 하나는 누굴까 하고 생각해보니 옆에서 듣고 있는 사람 같아요.

 

그러면 험담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전혀 하지 않을 수 없다면 최소한 줄여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첫째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자주 험담하는 사람은 대체로 보면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좋은 모습보다는 나쁜 모습을 더 먼저 보려고 합니다.

안경 낀 사람에게 왜 안경을 왜 끼고 있느냐고 물을 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잘 안보여서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은연중에 부정적인 사고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많이 하는 사람은 이 물음에 더 잘 보려고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을 때 제가 종종 생각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수도원에 밥을 한 그릇만 먹는 A라는 수도사가 있었고, 끼니때마다 밥을 두 그릇이나 먹는 B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도사들은 절제를 덕목으로 하잖아요. 그러니 B 수도사는 늘 A 수도사를 비롯한 동료수도사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험담의 대상이었어요.

세월이 흘러 밥을 많이 먹던 B 수도사가 죽었고, 몇 년 뒤에는 A 수도사도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런데 A 수도사가 보니까 B 수도사는 하늘나라에서 큰 대접을 받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A 수도사 자신에게는 별다른 상급이 주어지지 않는 거예요. 마음이 불편해진 A 수도사가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B 수도사는 절제하지도 못하고 밥을 늘 두 그릇이나 먹었는데, 왜 그에게 큰 상급을 주십니까? 이럴 수가 있는 건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더래요. “얘야, B는 밥 세 그릇이 정량이란다. 그런데도 두 그릇만 먹느라고 무척이나 참고 절제하였단다. 너보다 더 많이 절제하였어.”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도 저보다 밥을 더 많이 먹는 다른 목사님을 보면서 그가 저보다 더 많이 먹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의 정량은 더 큰데, 매우 절제하고 있다는 쪽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목사님이 혹시 김우영 목사님 아닌가요?’ 하고 저에게 묻지는 마세요. 그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을 때 떠오르는 이야기 또 하나는 오래전 어느 드라마에서 들은 말입니다. 김해숙 씨가 자기를 힘들게 하는 이웃 여자에 대한 불평을 자주 늘어놓자 남편인 송재호 씨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과 같은 환경에서 자랐고, 그 사람과 같은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면 당신도 그 사람처럼 했을지 몰라”. 대충 이런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저 사람과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교육받고 생활한다면 나도 그 사람과 마찬가지거나 아니면 더했을 수도 있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밥 두 그릇 먹는 수도사나 송재호 씨의 말을 생각한다고 해서 절대로 험담은 안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하여 좀 더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가질 수 있습니다. 자꾸 그러다 보면 험담을 하는 횟수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고요.

 

2. 험담을 줄여가려면 이렇게 다른 사람을 긍정의 눈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둘째로는 자신의 내면을 힘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험담에는 다른 사람도 포함되지만, 또 하나는 자신에 대한 험담도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이 있어요. 무슨 일을 조금 해보고는 금방 포기하면서 난 안돼. 애초부터 틀려먹었어하며 절망합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자학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신실한지 아닌지 교인들이나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더라도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고전 4:3). 사도 바울의 말에 힘을 얻어 청문회장에서 최 목사는 목사의 자격이 없다고 심판하더라도 저 역시 개의치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한다면 자신의 연약함을 놓고 스스로 절망하고 좌절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우리의 육체는 힘이 없으면 쉽게 지치고, 포기하게 됩니다. 힘이 없으면 일을 조금만 해도 힘들어서 주저앉게 됩니다. 우리의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이 약해지면 두려움이 찾아오고, 그 두려움은 자신을 무능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면서,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게 합니다.

오래전 한 유학생 가족과 함께 각자의 자동차로 북유럽을 여행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인터넷 사용을 거의 안 하던 시대였기에 사전에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갔습니다. 밤이 되어 한 호텔에 들렀는데 가격이 비쌌어요. ‘좀 더 가보자하고 그다음 호텔에 갔더니 거긴 더 비싼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 곳을 더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거긴 앞의 두 곳보다 더 비쌌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밤이 깊어서인지 아예 호텔 문도 안 열어놓고 사람도 없는 거예요.

그러자 유학생이 제안하기를 교회에 가서 재워달라고 해보자는 거예요. 한국처럼 생각했던 것이지요. 교회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을 보고 산비탈로 올라가 교회를 찾았습니다. 유학생 부부가 저보다 더 먼저 갔고 저는 한참 뒤에 따라 올라가는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공동묘지로 왔다는 거예요. 유럽이나 서구의 교회당 마당에는 묘지들이 많잖아요. 그것을 본 모양입니다. 한밤중에 공동묘지를 보고나니 그 유학생은 기절 직전까지 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밤에 공동묘지를 보면 무서워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내면이 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귀신을 자주 보는 사람 있잖아요. 대부분 속이 허하고 내면이 약한 사람입니다. 속이 허하면 귀신도 보이고, 두려움도 많이 느끼기에 자신을 쉽게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내면의 힘을 어떻게 키울까요?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존감이 강합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요한의 서신에서도 말씀하고 있어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고요(요일 4:18). 사랑을 많이 받으면 내면의 힘이 강해지고, 험담도 많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겠다고 하여 우리 마음대로 되나요? 부모님보고 날 더 많이 사랑해 주세요할 수도 없어요. 아내나 남편에게 나를 듬뿍 사랑해 주세요.’ 할 수도 없어요. 제가 아내에게 나를 더 사랑해줘하면 제 아내는 그럴 거예요. ‘당신이나 나를 더 사랑해줘.’, 아니면 이미 많이 사랑하고 있는데, 뭘 더 바래?’ 할 것 같아요. 그러니 배우자에게 기대하는 것도 어려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듬뿍 사랑하고 계십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아들을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대신 죽게 하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엄청난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수시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참 많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느끼는 용량이 커지면 커질수록 험담의 용량은 줄어듭니다.

 

3. 험담을 줄이는 세 번째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예요. 험담을 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들은 대체로 그 반대로 찝찝한 느낌이 들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기도하세요. “하나님, 험담이 내 입에서 사라지게 해주세요.”하고요.

야고보서 3장에는 우리가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들을 험담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안 된다고 하였어요. 유대인의 지혜를 담은 탈무드는 이런 경우를 더러운 상자 안에다 선물을 담아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였어요. 험담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고,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선물인데, 한 입으로 험담과 찬양을 하니까 더러운 상자에 좋은 선물을 담아서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꼭 험담을 해야 한다면 하나님 앞에 갖고 가서 하시기 바랍니다. 시편에 보면 저주의 시가 여러 편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척이나 힘듭니다. 나를 괴롭히는 그놈들의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 주세요. 잔치상을 받을 때는 식중독에 걸리게 해주세요. TV를 보다가 눈이 멀게 해주세요. 물론 성경에 ‘TV를 보다가라는 말은 없지만, ‘눈이 멀게 해주세요라는 말은 있어요. 이렇게 시편은 고통을 당하는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놀라실 거예요. 그렇게 기도해도 되나 하고요. 그렇게 기도해도 됩니다. 그러니 직장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나서 눈물을 찔찔 짜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일러바치세요. ‘하나님, 오늘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부장 그놈이 집에 가다가 차가 박살 나게 해주세요. 아니면 핸드폰을 들여다볼 때 핸드폰이 폭발하게 해주세요.’ 차라리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스트레스를 받아 암에 걸리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기에 성경은 기록해놓았고, 다윗을 비롯한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험담의 대상이 되고 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봅시다. 누가 나를 험담한다는 사실을 알면 기분이 더럽습니다. 그러나 초연하게 반응을 보일 수 있다면 좋은 것입니다.

도스토엡스키가 한 말이지요. “당신이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개들이 짓는다고 해서 돌멩이 던지려고 매번 발길을 멈춘다면, 그 목표에 도달하기 힘들 것이다.” 무시해버리자는 것이지요. 핀란드의 음악가 장 시벨리우스도 말했어요. “비평가들의 말에 신경을 쓰지 마라. 비평가를 찬양하는 동상이 세워진 적이 없다.”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누가 나를 비난할 때 내가 그 비난을 받을 이유가 있다면 받는 것이 나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나 내가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면 그 비난은 비난한 그 사람에게로 돌아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반대로 내가 누구를 축복할 때 그 사람이 받을만하면 그 사람이 받지만, 그 사람이 받을만하지 않으면 그 축복은 나에게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니 타인의 비난에 대하여 너무 혈압 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괜찮은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나를 질투하는가보다 하고요. 여러분이 무학대사 수준은 아니잖아요.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돼지로 비유하자,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부처님으로 비유하였지만, 그 경지까지 우리는 못가니까 그냥 나 자신이 잘나서 험담의 대상이 된다고 착각하면서 넘어가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것마저도 잘 안되면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시편의 저주시를 떠올려도 되고요. 하나님께 기도로 올리는 것, 그것이 훨씬 더 큰 반격이 됩니다. 내가 사람에게 누구를 나쁘게 말하는 것은 험담이지만, 내가 하나님께 누구를 나쁘게 말하는 것은 험담이 아니고 기도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험담에는 약간의 순기능도 있지만, 역기능이 훨씬 많습니다. 험담을 줄이기 위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강하게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험담을 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도 드리지만, 때로는 시편의 저주시를 사용하셔도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차 험담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갑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축복할 때 그 사람이 받을 그릇이 되지 못하면 내가 비는 그 축복은 내게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험담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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