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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대관식(마태복음 3:13-17)
최영모 [beryoza]   2023-09-17 오후 6:04:00 69

메시아 대관식(마태복음 3:13-17)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음악가 제바스티안 바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수난을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곡의 제목을 마태수난곡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바흐의 최고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3시간이 넘는 대곡인데, 문득 궁금해지는 것은 바흐는 왜 마태수난곡으로 이름을 붙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마가수난곡, 누가수난곡, 요한수난곡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마태복음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극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이 예수님의 생애에서 세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때이고, 두 번째는 세례를 받으신 때이며, 세 번째는 부활하신 때입니다. 탄생과 부활은 자주 언급되며 교회에서 중요한 절기로 기뻐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례는 가볍게 지나갈 때가 많아요.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가 갖는 의미를 이해한다면 성탄과 부활 못지않게 예수님의 세례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앞선 본문에서 보았듯이 요한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상징으로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으로 합니다만 원래의 세례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침례라고도 말합니다.

세례를 말할 때 잊지 못할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 러시아어 예배에 나오던 게라심과 아내 올가, 그리고 그의 장모께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두 딸을 포함하여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성탄절에 세례식이 있을 것이니 몇 달 기다렸다가 받으라고 했습니다. 게라심의 아내 올가는 난감한 표정으로 다른 교회에 가서 세례만 받고 오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굳이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만큼 간절히 세례를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저하자 옆에 있던 게라심의 장모께서 도발적으로 물었습니다. “만일 성탄절이 되기 전에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목사님이 책임질 수 있습니까?” 물론 그들은 모두 건강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싶은 갈망을 그렇게 표현한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저는 결국 승낙하고 말았습니다.

한 달간의 교육 후에 세례를 받던 날, 게라심의 장모께서는 그동안의 태만했던 신앙을 회개한다는 내용의 간증을 교우들 앞에서 하였고, 게라심의 두 딸은 북춤을 공연했습니다. 딸들은 세례를 감사하면서 자기들의 달란트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북춤 실력이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게라심 부부는 그날 모든 교우에게 간단한 식사를 접대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가족 전체가 그렇게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도, 그 감사를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이어가는 것도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사람들도 아마 그런 마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이 주는 세례는 죄를 회개하게 하는 세례입니다.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근거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면 예수님도 죄가 있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했다는 말인가요? 만일 죄가 있어서 세례를 받으셔야 했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죄가 없다고 한다면 굳이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이유에 대한 암시가 조금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시자 요한이 만류하면서 말합니다.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이 말은 죄 없는 메시아께서 왜 세례를 받으려고 하십니까? 오히려 내가 선생님에게 세례를 받아야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모든 의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사귀며 사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으며 불순종했어요.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고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5:12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자손인 우리는 모두 죄의 뿌리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나는 과일 알레르기가 있어서 과일 근처에도 가지 않아요. 아담처럼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아담과 같은 죄인입니까? 억울합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의하거나 하지 않거나 간에 죄의 DNA는 모든 인류에게 흘러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구약 성경(율법)은 죄의 해결책을 짐승으로 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사람이 죄를 짓고 용서함을 받으려고 할 때, 그는 먼저 제물로 삼을 깨끗한 송아지나 염소 혹은 양을 끌고 제사장에게 갑니다. 그리고 끌고 온 소나 염소나 양의 머리에 자기 손을 올려서 안수합니다. 자신의 모든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한다는 상징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동물은 사람의 죄를 안고 제물이 되어서 죽는 거예요.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비롯한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희생제물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손을 얹습니다. 그때 온 인류의 죄, 저와 여러분의 죄는 예수님에게 전가됩니다. 고린도후서 5:21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예언해놓은 이사야 53장은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4~6)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지우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요한이 세례를 만류할 때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해야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단강 물속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아마도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표현하였던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장일순 선생은 어느 날 찾아온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큰비가 오는 바람에 강이 흙탕물이 됐다고 하자. 그 물, 그 흙탕물을 다시 맑은 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

젊은이가 선뜻 대답을 못 하자 장일순 선생은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세 가지 부류가 있겠지. 한 부류는 강둑에 서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둑을 쌓는 사람들이다. 둑을 쌓고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나라면 물속에 들어가 물과 함께 흘러가겠어. 흘러가며 맑아지는 거지.”(최성현, <좁쌀 한 알>, 224-5)

 

죄로 인하여 흙탕물이 되어버린 인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흙탕물이 되어버린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어요. 흙탕물로 더러워진 우리와 함께 흘러가면서 우리를 맑고 깨끗하게 하시려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례는 단지 흙탕물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담 안에 있던 우리를 불러내어 새로운 인류로 만들어 주셨는데, 단순하게 죄 용서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윤인희 사모님께서 주간마다 여러분에게 큐티 교재를 보내드립니다. 그 교재에는 여러분의 이름을 기도 제목에 올리고 있는데, 종종 자기 이름이 올라가는지 알고는 계시지요?

요즘 큐티 본문은 열왕기서인데, 솔로몬이 성전 건축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전건축이 출애굽 한 지(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지) 480년 만에 시작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뜬금없이 성전건축에 오래전의 출애굽을 왜 언급하는 것입니까?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놓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라는 주장과 정부수립일인 1948년이라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서로 주장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1919년이라는 주장은 그 뒤에 이어져 온 일제 강점기를 인정하지 않으며, 1945년의 해방을 거쳐 1948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면서 480년 전의 출애굽을 말하는 것은 출애굽의 목적이 성전이고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이집트의 왕에게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예배할 수 있게 하여라라는 말을 무려 여섯 번이나 하십니다(7:16; 8:1,20; 9:1,13; 10:3). 노예로 살던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신 것은 단순히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종종 표현하는데, 매우 적절한 것 같습니다. 우리 말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라는 말 있잖아요. 은혜를 입은 사람이 오히려 그 은인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신 후 잘 살라고 보따리까지 챙겨주셨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물에 빠져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갔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달랑 몸만 하나 건져놓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보따리가 있어야 살아가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우리를 건져주시고, 그다음에는 보따리까지 챙겨주신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물에서 건져내신 후에 왜 보따리를 주실까요? 신앙의 성숙함을 기대하시기에 보따리를 주십니다.

에베소서는 말합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4:14,15) 히브리서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초보 단계를 벗어나 성숙한 경지로 나아가자고 격려합니다.

성경은 수많은 축복과 상급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복과 상을 받는 거야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축복과 상급의 수준까지 도달하라고 약속해놓은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너 이번 시험에서 80점 이상 받으면 최신 핸드폰을 사줄게 하고 약속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말한 목적이 핸드폰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신 것은 복이 목적이 아니라 그 수준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 목적입니다. 복을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그 단계까지 성숙해지라는 의미에서 약속해놓은 거예요. 보따리가 목적이 아니라 보따리에 맞는 신앙과 인격을 소유해가라는 것입니다.

제가 딸의 결혼 선물로 큰 빌딩을 하나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서울 강남에 30층짜리 빌딩을 짓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제 딸이 유명한 건축가를 보고는 그와 악수하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카톡에 올리고, 핸드폰에 올리고,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리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사람과 악수했다고, 이 사람을 내가 알고 있다고 자랑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 건축가가 딸의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내가 이런 사람의 빌딩을 짓기로 했다고 자랑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건축가가 딸 덕분에 수지맞은 것이지 딸이 건축가를 먹여 살리려고 건축을 의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이 지점에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 복을 준비하신 건데,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그 복에만 눈이 꽂혀있는 것입니다. 복을 받은 것만 자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신앙의 성숙은 어림도 없습니다. 늘 초보 단계에만 머물러 있게 됩니다.

 

신앙의 성숙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 해 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한 사나이가 동물원에 갔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신앙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사자 우리 안으로 밧줄을 타고 내려가면서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다니엘처럼 사자들 속에 있어도 무사할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참혹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던 암사자가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넘어뜨리고, 그의 경동맥을 물어뜯은 것입니다. 간신히 목숨은 건지긴 했습니다만 이런 것을 용기 있는 신앙, 성숙한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신앙이 성숙한 신앙일까요? 평생 제가 붙들면서 제 삶의 기초로 삼는 성경 말씀이기도 한데, 야고보서 1:27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성숙한 신앙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 당시에 고아와 과부는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의 대명사였어요. 누가 와서 때리면 어디 가서 호소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라는 말씀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며라고 할 수 있고요.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 이 말씀은 나는 세속의 가치관을 따라가지 않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은 타인을 향해서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관심과 배려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며, 자신을 향해서는 세속의 가치관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의 가치관은 다음에 보게 되는 마태복음 4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례를 출발점으로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을 메시아대관식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대관식에 세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드디어 소통의 문이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이전까지는 막혀있던 길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하늘에서 땅으로, 또 땅에서 하늘로 통하는 길을 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찢어진 것은 길이 열렸음을 다시금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관식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모습은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온 것입니다. 대개 성화들을 보면 성령을 비둘기로 그려놓았어요. 이삭교회당 안에서도 한 중앙에서 둥근 돔 천장을 올려다보면 86.5m가 넘는 높은 곳에 비둘기의 그림이 있습니다.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다는 말이지 성령이 곧 비둘기는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비둘기가 올리브 잎을 물고 방주로 돌아왔어요. 여기에서 비둘기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는 것은 성령으로 채워진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복음서 저자는 그림 언어로 보여주는 거예요.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었고,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관식에서 일어난 세 번째 모습은 예수님이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왜 좋아하십니까? 그 이유는 인류를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불쌍히 여기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려고 세례를 받으시며 순종하신 것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에서 건짐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늘 건짐만 확인하면서 살지 마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숙한 삶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성숙한 삶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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