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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초상화(마태복음 16:13-16)
최영모 [beryoza]   2022-12-04 오후 8:30:18 119

예수의 초상화(마태복음 16:13-16)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의 촛불이 켜진 오늘,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장 빨리 나는 새 이름을 아세요? 그 새의 이름은 '어느새'라고 합니다. 2022년도가 시작된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습니다.

 

1960년도에 상영된 이탈리아의 흑백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은 한 헬리콥터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예수의 동상을 로마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헬리콥터는 예수의 상을 줄에 매달고 가는데, 마을의 어린이들은 신나게 소리 지르면서 헬리콥터를 뒤쫓아갑니다. 건축 현장에서 일하는 두 사람은 헬리콥터의 예수상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손만 흔들고는 자기 일을 계속합니다. 건물 옥상에서 일광욕하던 비키니 차림의 네 아가씨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기 봐. 예수야. 어딜 가는 거지?” 하면서 자기들끼리 소리칩니다. 그러면서 예수상을 옮기는 헬리콥터를 뒤쫓아온 다른 헬리콥터에 탄 기자들에게 예수를 어디로 옮기느냐는 등의 질문을 하지요. 그러는 중에도 콘크리트 예수상은 아무 말 없이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뿐입니다. 예수상을 신나게 쫓아가는 사람들, 별다른 관심 없이 자기 일에 열중인 사람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면서 서로 묻는 사람들 등 하나의 예수상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시대의 요구에 따라 예수를 바라보는 상이 달랐습니다. 6.25 때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에게는 위로자 예수였습니다. 새마을 운동과 함께 산업화의 바람이 불 때는 소외 계층이 생겨나면서 가난한 자의 친구 예수였습니다. 그리고 민족 분단을 아파하는 이들에게는 통일을 위해 애쓰는 예수였고, 아픈 이들에게는 병을 고치는 예수, 성공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CEO(최고경영자) 예수가 초상화로 그려졌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인식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존 로크(John Locke)나 스피노자(Baruch Spinoza)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는 그 의식이 백지상태와 같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아무것도 없는 하얀 종이와 같은데, 태어난 뒤에 보고 듣고 느끼고 의식하는 모든 경험을 통하여 어떤 관념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관념에 따라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며, 신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백지와 같은 의식에다 예수라는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개 영화나 아니면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를 보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상상할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러 영화를 보았는데 한결같이 예수님은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긴 머리, 파란 눈과 하얀 피부, 그리고 키가 큰 백인의 모습입니다. 그런 그림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을 볼까요? (사진)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사진들이지요. 우리에게 전해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주로 서구 사회를 통하여 전해졌습니다. 심지어 저 창문에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도 그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BBC 방송은 신의 아들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예수님의 얼굴을 공개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이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예수님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유대인 두개골들을 찾아내었어요. 그것을 영국의 한 법의학자가 컴퓨터 단층 촬영과 디지털 3D 기법을 활용해서 예수님의 얼굴과 가장 비슷했을 얼굴을 복원한 것입니다. (사진)

저는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크게 충격받았습니다. 기존에 가진 예수님의 이미지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선 짧고 검은 머리인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머리를 길게 하지 않았습니다. 긴 머리는 남자의 수치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피부는 까무잡잡합니다. 예수님은 30세가 될 때까지 목수로서 주로 야외에서 일했기에 하얀 피부일 수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살았던 지역의 성인 남자들의 평균 키는 150cm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키가 컸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요.

물론 이 얼굴도 예수님의 진짜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나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보다는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 이사야 53장에서는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는데,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후자의 모습에 더욱 매력이 끌립니다. 그분은 잘 생기지 않았기에 잘 생기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며, 키가 크지 않기 때문에 키 작은 사람도 든든할 수 있습니다.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저 같은 사람도 미소를 짓게 되고, 병을 앓고 있었기에 그분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하게 태어나셨기에 가난한 사람에게 위로를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하고 그리는 예수님의 초상화는 여러분의 인식을 완전히 벗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습니까? 대림절인 지금 여러분이 기다리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앉아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는 각각 다를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교회사에 나타난 예수님의 초상화 역시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시대마다 나타나는 특징이 있었어요.

1. 초대교회 시대의 초상화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에서 하신 것처럼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모습

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Diognetus)에는 로마인과 기독교인들의 차이를 말하면서 기독교인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웃의 짐을 대신 져주는 사람, 자기보다 못한 이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사용하는 사람, 궁핍한 자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의 선물로 제공하여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신이 되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다.”

 

2. 비잔틴 시대의 초상화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표현한 모습

모자이크는 다양한 색채를 가진 유리 조각을 붙여서 만드는 예술 양식입니다. 이삭성당에는 매우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만든 성화들이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와 바울의 거대한 모자이크 초상은 보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말할 수 없이 박해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예수님을 죽음을 넘어선 존재, 영생하는 분으로 묘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색색의 유리 조각으로 예수님의 초상화를 정성껏 그렸던 것입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로 최고의 아름다움을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모습입니다.

 

3. 중세 시대의 초상화 금빛 법복을 입고 왕의 지팡이를 든 심판자의 모습

중세 시대의 교회는 교회의 힘을 강화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도 많았어요. 교회를 정화하려고 만든 종교재판소는 많은 사람을 이단과 마녀로 몰아서 그들을 죽였습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두 수도자가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라는 제목으로 어떤 사람이 마녀인가를 확인하는 지침서를 펴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여자는 마녀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마녀일지 모른다.’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여자는 마녀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마녀일지 모른다.’ 그럼 뭡니까? 모든 사람이 마녀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교회는 사람들을 심판하였고, 그런 시대에 예수님의 초상화는 심판하는 왕의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은 심판의 주님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무관심인 자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4. 근대시대의 초상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겪는 모습

중세 시대에는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세가 저물어 가고 근대가 되면서, 이성이 중요해졌고 사람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런 사상은 예수님의 초상화도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그리도록 했습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입니다. 그가 쓴 책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악마가 하나님의 수호천사라고 자신을 거짓으로 소개하면서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통 인간으로 살아가라고 유혹합니다.

인문주의(Humanism)가 발달하던 시대의 예수님의 초상은 인간 예수의 모습, 고뇌하고 목마르고 배가 고프기도 한 모습 등으로 많이 그려졌습니다.

 

5. 오늘날의 초상화 양 떼를 인도하는 목자의 모습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복을 주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병이 들었을 때는 병을 고쳐 주시고, 가난하고 배고플 때는 배부르게 하시며, 힘들 때는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창문에도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 안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요? 소원이 있을 때는 그 소원을 들어주시고 만족하게 하시는, 그렇게 자비로운 분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예수님의 초상화들은 지난 2천 년의 교회사에서 그려진 모습들입니다. 그러면 미래에 그려질 초상화의 모습은 어떨까요? 미래에 그려질 초상화는 여러분 각자가 그리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내면에 들려주시는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가장 정확하고, 그리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려주는 초상화가 아니라 여러분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사님이나 설교자가 말해주는 초상화 역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익히고 공부하면 성령께서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셔서 예수님의 가장 바른 모습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교회당을 어떻게 장식하느냐는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당을 화려하게 꾸미면 교인들도 화려한 삶을 좋아하고, 자기의 집도 화려하게 꾸미려고 합니다. 교회당의 장식이 소박하면 교인들도 소박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핀란드 교회당들은 화려하지 않고, 매우 단순하고 검소하게 꾸밉니다. 그러니까 핀란드 디자인들도 대체로 단순한 편이고, 핀란드 국민도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당도 단순한 편이지요? 작년까지 교회 강단 위 좌우로 빛이 비치는 작은 전구들이 있었습니다. 주일 저녁에 우리 교회당을 빌려서 사용하는 러시아 교회가 처음 설치를 제안했는데, 제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수락을 해버렸어요. 그러나 만들어놓은 모습이 정말 맘에 들지 않았지만, 바로 철거하라고 할 수도 없어서 긴 시간 참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만해도 되겠다 싶어서 제거했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 러시아공동체의 찬양팀은 그런 시설들을 자꾸 사용해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눈에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에는 어떤 예수의 초상화를 그려갈까 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예수일까요, 단순한 예수일까요? 어느 것이 더 좋으냐 하는 물음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리고 싶은 초상화는 어떤 것이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때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을 여러분 믿음의 바탕에 깔아놓고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려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의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신다면 그 초상화는 여러분에게 생을 반드시 복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원을 품고 대림절을 보내며,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가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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