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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넘어선 믿음(누가복음 (17:11-19)
최영모 [beryoza]   2022-09-25 오후 6:05:01 147

상황을 넘어선 믿음(누가복음 (17:11-19)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유머입니다만, 고양이가 쥐를 쫓아가는데, 쥐도 결사적으로 도망갑니다. 막 잡으려던 순간에 쥐가 그만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어요. 쥐는 ~ 살았다.” 하는데, 구멍 밖에 있던 고양이가 멍멍멍하면서 개 짖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자 쥐는 개가 와서 고양이가 도망을 갔나?’ 하면서 구멍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고양이는 잽싸게 쥐를 잡아챘습니다. 잡은 쥐를 물고 가면서 고양이가 한마디 했습니다. “요즘은 먹고 살려면 두 개 언어는 해야지.”

동물과 사람의 차이를 말하는 것 가운데 반응(reaction)과 응답(response)이 있습니다. 반응과 응답은 비슷한 것 같아도 전혀 다릅니다. 배고플 때 냉장고 문을 바로 여는 것은 반응입니다. 그러나 배고플 때 다이어트를 하려고 참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 배고픈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것은 응답입니다. 졸리면 가서 누워 잡니다. 반응입니다. 그러나 졸리면 샤워하면서 잠을 쫓습니다. 그것은 응답입니다. 동물은 반응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번 더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면서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나병은 전염병으로 분류되어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집과 마을에서 떠나야 했고, 성 밖으로 나가 동굴 같은 곳에서 사람들을 피하여 살아야만 했습니다. 만일 사람들을 보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큰소리로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그들은 떼를 지어 동네로 가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놀라서 음식을 내놓게 되고 그것으로 먹고삽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열 명이라고 한 것은 그렇게 떼를 지어 살아야만 하는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나병 환자 열 명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지만, 예수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기에 멀리 서서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병 환자들에게서 첫째로 상황을 넘어서서 예수님께 간청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의 신앙으로 본다면 자신들에게 닥친 역경을 체념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역경이 오면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답니다. 체념형입니다. 역경을 만나면 그대로 주저앉아버리는 사람입니다. 도피형입니다. 일단 위기만 벗어나야지 하고 피하는 사람입니다. 돌파형입니다. 당당하게 역경에 맞서 헤쳐나가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역경 앞에서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병 환자이기에 어쩔 수 없지하고 그들은 체념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데, 이대로 살다 죽어야지하면서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열 명의 나병 환자는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예수님을 부르면서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구약성경 에스더기는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 시대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반 역사에서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스 왕인데 영화 <300>에서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그 시대에 총리인 하만이 유대인을 모두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감추고 왕비가 되었는데,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민족이 모두 죽게 될 상황이 되자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에스더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유대인들은 모두 살아날 수 있었고, 유대인을 죽이려던 하만이 오히려 죽임을 당합니다. 에스더는 위기 앞에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어느 순례자가 길을 가는데, 한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당 지붕에는 마귀들이 누워서 한가하게 낮잠을 자고 있어요.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까 교인들이 기도는 하지 않고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귀들이 할 일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편하게 낮잠을 즐기는 것입니다.

순례자가 계속 길을 가면서 또 다른 교회당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당 지붕에서는 마귀들이 창으로 지붕을 마구 두드리면서 발악하는 거예요. ‘저 교회는 왜 그럴까하면서 순례자는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어요. 안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마귀의 가장 큰 관심은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는 봉사, 기도 없는 신앙, 기도 없는 사업, 기도 없는 공부를 마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요. 기도 없는 지식과 지혜, 기도 없는 노력과 수고도 우습게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마귀는 가장 크게 두려워합니다.

 

둘째로, 나병 환자 열 명에게서 상황을 넘어서서 순종하는 모습을 봅니다.

나병 환자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율법에 따르면 나병에 걸렸다가 회복된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해야 합니다. 당시의 제사장은 의사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너는 나았다하고 판단을 내리면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사회생활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가와서 손을 잡고 기도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약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몸을 보면 아직 낫지 않았어요. 여전히 보기 흉한 상처들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럴 때 가야 합니까, 아니면 말아야 합니까? 그러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순종하는 거예요. 낫게 해달라고 했으니 나을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매일 햇볕이 쨍쨍 비추니 곡식은 말라 죽을 지경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큰 걱정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 모여 비 오기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목사님은 36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았으나 예언자 엘리야가 기도하니 비가 온 것처럼 우리도 기도하면 비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침부터 마을 사람이 모두 교회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니까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박수하면서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비는 계속 옵니다. 그때 교회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녀가 우산을 펴는 거예요.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아침에는 날씨가 맑았는데 어떻게 우산을 갖고 왔느냐고 물었어요. 소녀가 그럽니다. “비가 오는 것을 위해 기도한다고 했잖아요. 비가 오면 옷이 젖으니까 우산을 갖고 왔지요.” 그 말을 듣고 있던 목사님이 말합니다. “오늘 이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 믿음으로 기도한 사람은 저 소녀밖에 없습니다. 지금 비가 오는 것은 저 소녀가 기도한 것 때문입니다.”

 

기도를 단순히 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선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마음의 평정과 소원을 아뢰기도 하지만, 기도한 내용을 마음에 두면서 행동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소녀처럼 하나님께 기도했으면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거예요. 순종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것을 넘어서서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러시아에서 경험하는 새로움 가운데 하나는 날씨가 추워지는 요즘에도 길거리에서 수박을 팔고 있다는 것입니다. 10월에는 더 춥고 때로는 눈도 오는데, 수박장사는 두꺼운 파커 잠바를 입은 채 수박을 팔고 있는 모습이 여러 해 동안 늘 새로운 인상을 주었습니다.

수박씨를 땅에 심으면 그것은 자기보다 20만 배나 더 무거운 흙을 뚫고 나옵니다. 조그맣고 검은 수박씨를 쪼개 보면 안쪽에는 하얀 게 있어요. 벼로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 하나를 심어 놓으면 자기와 같은 씨를 수백 개 가진 커다란 수박으로 자랍니다. 참 신기해요.

성경에서 씨앗을 흔히 말씀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지고 심어지면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며, 유혹을 이기는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열린 마음이란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카톡에서 매일 받아보는 한 절 말씀이나, 혹은 가정기도 가이드를 통하여 말씀을 우리는 받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자꾸 노력하고 기도해보세요. 점차 말씀의 사람으로 변해갈 것이고, 자신도 놀랄 정도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열 명의 나병 환자들 가운데 오직 한 명에게서 상황을 넘어서서 감사하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던 중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또 기뻤겠어요. 자기에게 있던 나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사람을 멸시하고 조롱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직 그 사람만이 감사한 것입니다.

자기 몸의 나병이 치유된 것을 확인하자 바로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감사한 그 사마리아사람을 보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물론 예수님은 나병이 나으면 돌아와서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건부로 치유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감사하지 않았다고 하여 나머지 아홉 사람은 다시 나병이 들어 평생 살아갔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말씀은 섭섭함을 넘어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합니다. 자발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예수님은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은 다른 아홉 사람은 왜 그랬을까요? <아홉 사람의 변명>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글을 보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 첫째 사람은 먼저 제사장에 가서 확실하게 나았는지 그것부터 확인해야지.’ 하면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둘째 사람은 혹시 병이 다시 재발할 수 있으니 며칠 두고 봐야지.’ 하면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셋째 사람은 내 병은 나병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냥 단순한 피부병이었나 봐.’ 하면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넷째 사람은 아마도 병이 나을 때가 다 되어 나은 거야.’ 하면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사람은 예수 선생이 특별한 약을 지어준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해 기도해 준 것도 아니잖아.’ 그러면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여섯째 사람은 다른 랍비들한테 부탁해도 완치됐을 거야.’ 하면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일곱째 사람은 일단 집에 가서 먼저 목욕하고 옷도 갈아입은 뒤에 시간이 되면 예수님께 가도 되겠지.’ 하면서 감사를 뒤로 미룹니다. 여덟째 사람은 가족부터 만나야겠어. 얼마나 오래 만나지 못했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 하면서 역시 감사하지 않습니다. 아홉째 사람은 감사한 마음이야 있지만 다들 제사장에게로 가는데, 나도 그냥 가자.’ 하면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감사한 사람의 비율이 1/10밖에 되지 않을까, 혹시 우리 교회 교인들도 90%는 감사하지 않고, 10%만 감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디 우리 교회는 숫자가 반대로 되어 아홉 명은 감사하고 한 명만 감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말하고 보니 좀 이상하네요. 우리 교회는 10명 모두가 감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감사할 일을 찾으면 참 많습니다. 저의 얘기이기에 용서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 넘어져서 다쳤는데 안경이 깨지고 눈 주위로는 이렇게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날 저녁에 저는 하나님께 다섯 가지를 감사했습니다. 다친 그 순간 마침 아내가 약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로 바를 수 있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다쳤어도 눈을 다치지 않아서 감사했습니다. 더 심하게 다치지 않고 이만큼만 다치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아내나 딸이 다치지 않고 제가 다친 것에 감사했습니다. 안경은 깨졌지만 다른 안경이 하나 더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에서 다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만들지 않은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를 이미 불행으로 벌하셨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모를 때 이미 그는 불행이라는 벌을 받고 있다는 거예요. 로마서 1장에는 사람들이 짓는 여러 가지 죄들을 말하고 있는데, 감사하지 않는 것은 큰 죄라고 말합니다.

 

다음 주일은 우리가 추수 감사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리는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올 한 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감사하는 사마리아사람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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