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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길3(요한복음21:15-19)
최영모 [beryoza]   2022-09-11 오후 7:54:06 59

베드로의 길3(요한복음21:15-19)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추석 명절 연휴 중입니다. 추석 명절에 가장 많이 받는 스트레스 1위가 잔소리라고 합니다. “넌 언제 취직할 거냐?”, “넌 언제 결혼할 거냐?” 이런 질문들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잔소리를 듣게 된다는 거예요. 러시아에 사는 우리는 이러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것을 감사합시다. 명절을 맞이하면서 몇 가지 음식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사정상 다음 주일로 미루고 오늘은 소박하게 식사하려고 합니다.

유대인에게는 특별한 메시아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 전반을 흐르고 있는 메시아는 강력한 힘을 갖고 등장합니다. 그 메시아는 악한 세력을 쳐부수고,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며, 이스라엘을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메시아의 이미지가 하나 더 있어요. 그 메시아는 매우 연약하여 사람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받으며, 찔리고 매 맞고 고문을 당한 후에 죽는 그런 메시아 이미지입니다.

사람들은 이 두 메시아의 상반된 이미지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메시아가 강력한 힘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승리한다고 했는데, 한편으로는 힘없이 매 맞고 죽는다고 하니 서로 모순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후자의 메시아, 즉 매 맞고 고문당하며 힘없이 죽는 메시아는 잘못 예언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잖아요. 메시아가 오면 새로운 나라,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와서 힘없이 죽는다면 그게 무슨 메시아입니까? 그러니 당연히 그런 메시아는 틀린 것이고, 성경의 그런 예언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강력한 메시아 예언은 받아들이고, 힘없이 패배하는 메시아 예언은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은 사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의 예언이었습니다. 메시아가 두 번 오는데, 먼저 온 메시아는 수난 가운데 힘없이 죽으며, 강력한 심판의 메시아는 나중에 오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과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예언이 정확하게 맞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두 번 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 한 번 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오해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다른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메시아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있는 로마를 쳐부수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해방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했는데, 예수님이 나는 예루살렘에 가서 죽겠다라고 하니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예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반발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베드로가 걸어간 신앙의 길 세 번째 계단이 어떤 것인지 보려고 합니다.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셨어요. 곧 져야 할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은 고통을 느끼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있거라.” 그리고 예수님은 조금 더 앞으로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그리고 돌아와서 보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님은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다시 가서 세 번째로 기도하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와서는 이제 남은 시간은 자고 쉬어라.” 하셨어요. 예수님이 삐져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구원의 사명을 위하여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도움 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의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어요. 그때 베드로는 갖고 있던 칼을 꺼내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쳤고, 그의 귀를 잘랐습니다. 우발적인 행동이었는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돕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베드로를 막으셨습니다. 이것 역시 베드로가 예수님을 도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여 대제사장에게로 끌려가자 베드로가 멀리서 따라가면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 서 있는데, 한 하녀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

그러자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나는 당신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다른 하녀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베드로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에요. 내가 본 적이 있어요."

그러자 베드로는 하나님께 맹세하건대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하면서 이번에는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합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난 후, 다른 사람들이 와서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투를 보니 확실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저 예수라는 자와 함께 다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도 좋소. 맹세하건대 나는 저 사람하고 함께 다니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자신을 저주까지 하면서 맹세하고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을 가실 때 베드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수난당하고 십자가에서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제자들은 목숨이 두려워 모두 잠적해버리고 맙니다. 이토록 허무하게 죽어버린 예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3년을 생각하면 제자들은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 보기에도 부끄러웠습니다. 3년이 마치 몽환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희망은 사라지고, 기대는 무너져버린 3일이 지나자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번이나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그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빌면서, 사명을 맡기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힘을 내고 일어섰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찾아오셔서 만나고 사명을 맡겼지만, 제자들은 무기력함에 빠져있었고, 그런 절망에서 벗어날 의욕도 없었습니다. 그 직후에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우리도 두 번이나 그분을 만났으니 이제는 정신 차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가자.”라고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다른 제자들에게 한 말은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소.”였습니다.

고기 잡으러 가겠다는 말은 바람도 쐴 겸 예루살렘 근방의 호수로 낚시질하러 가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갈릴리로, 고향으로, 전에 하던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가겠다는 말입니다.

제가 구글 지도로 예루살렘과 갈릴리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얼마나 걸릴까 하고 측정해보았습니다. 길이 좋은 요즘에도 30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그러니 하루 10시간씩 걷는다 치더라도 꼬박 3일 걸립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예루살렘을 떠나 멀리 고향으로 가겠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 사명의 길에서도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는 베드로의 말에 다른 제자들이 호응하여 여섯 제자가 디베랴 바다(게네사렛 호수, 갈릴리 호수)로 갔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고기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가뜩이나 착잡한 심정이었는데, 거기에다 씁쓸함과 허전함이 물밀듯 밀려옵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 그러니까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호숫가에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여보게들, 뭐 좀 잡았소?”하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공쳤습니다.”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그 사람은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져보시오.”라고 말했어요. 제자들은 별 기대를 하지 않은 채 밑져야 본전이지하면서 그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을 끌어 올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거예요.

그 순간, 고기를 잡고 있던 요한에게는 3년 전 이 호수에서 있었던 예수님과 만남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허탕을 쳤는데, 예수님의 말을 듣고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생각이 들면서 요한이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역시 성격 급한 베드로는 벗고 있던 몸에 급히 겉옷만 두르고서는 바로 바다로 풍덩 하고 뛰어들었습니다. 헤엄쳐서 육지로 갔겠지요.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탄 채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에서 잡은 고기가 153마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하는 중요한 순간인데, 계산에 빠른 사람 아니고서는 어찌 그 파닥거리는 고기를 세어보았을까 상상하면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 당시 지상의 모든 물고기 종류의 숫자가 153 종류로 이해하고 있기에 요한은 그런 상징어를 사용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요.

제자들이 육지에 도착하여 보니 예수님은 이미 불을 피워 생선을 굽고 빵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밤새 노동으로 지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와서 밥을 먹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빵을 준비하시고 생선을 구워 상을 차리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이 식사했습니다. 더 중요한 일이 아침 식사 이후에 준비되어 있었어요. 식사를 마치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과거의 베드로 같았으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주님. 내가 얼마나 사랑한다고요.”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해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두 대답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납니다. 과거 대답은 판단의 근거와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면 지금 대답은 판단의 근거와 기준이 주님에게 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도 주님께서 사랑한다고 하시면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 판단의 기준이 나에게 있었기에 내가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것이고, 아니라면 아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은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더니 예수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과거 같았더라면 이렇게 다시 물을 때 주님, 섭섭합니다. 내가 가족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렇게 물으시면 안 되죠.” 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이번에도 베드로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결심에 있지 않고 주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것에 달려있음을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 떼를 쳐라.” 하면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더니 예수님은 세 번째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는 그만 물으실 줄 알았는데, 세 번이나 물으시니 베드로는 불안해하면서 대답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에게 사명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양 떼를 먹여라.”

예수님이 체포당하기 전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하실 때 모든 사람이 부인하더라도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친 베드로입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베드로의 판단과 베드로의 결심이 주님의 말씀보다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단계가 바로 베드로 신앙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주님께서 그렇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 우선이지, 내 결심과 내 생각이 우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어떤 행위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베드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기도마저도 보태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대제사장 종의 귀를 잘라버렸지만, 오히려 주님의 충고를 받았을 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사명을 맡기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지만, 베드로는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면서 갈릴리로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 새벽 어디에서 구하셨는지 빵과 고기로 식사를 준비해놓고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한 번 목표를 정하면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쫓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서 다시 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집요한 추적을 하늘의 사냥개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에 걸쳐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신 것은 의도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부인했거든요.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깊은 상처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마다 괴로움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던 상처를 세 번 사랑의 고백을 하게 함으로써 가슴에 깊이 응어리진 그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물으신 것은 베드로를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고 은혜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라는 말을 너무 남용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은혜를 매우 값싼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간단하게 잘못했습니다하고 회개하면 다 용서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물론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도 용서를 받을 것으로 안다면 그건 아닙니다.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던 주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종교의 이야기이지만, 다음의 얘기가 베드로의 내면까지 치유해주시려고 하신 주님의 의도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힌두교 광신자가 간디에게 와서 매우 괴로워하면서 자기가 한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간디가 묻습니다. “왜 죽였지요?”

그 남자가 대답합니다. “그들이 제 아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슬람교도들이 제 아들을 죽였다고요.”

그 말을 듣고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죠. 아이 한 명을 찾으세요. 그 아이의 엄마와 아빠가 살해당한 그런 어린 소년을 찾아서 그 아이를 당신의 아들처럼 키우세요. 그런데 그 아이는 이슬람 아이라야 합니다. 또 한 가지, 그 아이를 반드시 이슬람교도로 키워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싶으십니까? ‘잘못했어요하고선 !’ 하는 것은 자칫하면 거짓된 회개가 됩니다. 잘못한 일에 대해서 보상까지 하려는 마음을 품고 회개할 때 그 회개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훨씬 더 깊이 여러분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예가 적절한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저의 얘기라서 용서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운전하고 가는데 교통경찰이 세웠습니다. 그런데 면허증을 갖고 나오지 않았어요. 당황이 되면서 순간 주여, 살려주세요.’ 하는 다급한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차에 대한 서류만 보여주고는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차 서류만 들여다보더니 운전면허증은 보자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가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이런 경우 어떻게 하십니까?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는 끝나지 않습니까? 저는 그날 면허증을 갖고 나가지 않은 것은 분명 저의 잘못이기에 이렇게 회개했습니다. 위반하여 걸릴 때 물게 되는 벌금 액수만큼 예배에서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여러분도 다 이렇게 하시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한 것에 대한 진정한 회개는 대부분 손해와 아픔이 따라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다가오고, 구원은 더욱 값지게 느껴질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여러분이 한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여러분은 방해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고 붙드셨습니다. 그것이 은혜로 여러분에게 느껴질 때, 그리하여 판단의 근거가 여러분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인정하심에 있다고 깨달아질 때 여러분의 구원은 비로소 플러스 상태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한 번 배신한 놈은 다시 또 배신하게 되니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배신한 제자들을 교실이나 배 밖으로 차 내버리지 않고, 그들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끝까지 설득하고 또 설득하십니다. 지금도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설득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설득에 겸손하게 순종하면서 신앙의 복된 길을 걸어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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