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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워진 우물을 파라 2 (창세기 26:17-18)
김우영 [ready4god]   2022-06-26 오후 8:01:45 995

20220626 - 315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메워진 우물을 파라 2

 

창세기 26:17-18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 이 우물들은, 아브라함이 죽자,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 버린 것들이다. 이삭은 그 우물들을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부르던 이름 그대로 불렀다. /이삭의 종들이 그랄 평원에서 우물을 파다가, 물이 솟아나는 샘줄기를 찾아냈다.

 

여는 말

최근 열심을 내는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자전거 타기입니다. 제가 자전거를 탄 상상을 하며 연민과 긍휼을 떠올리시는 분이 있겠지만, 여튼 잘 타고 있습니다. 인대 수술 이후 수영장에 다녔는데 코로나 이후엔 못했습니다. 이후 꾀가 나서 다시 수영을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 날씨가 좋아지며 사람들이 자전거를 많이 타는 모습이 부러워 수영장 회원권 끊는 대신 자전거를 장만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10cm의 보도블록을 폼나게 뛰어 오르려다 그만 자빠졌습니다. 양 무릎과 팔꿈치에 상처가 깊게 생겼습니다. 당장 아내와 아이들은 자전거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파스와 보호대를 차고 다시 자전거를 탔습니다. 

그저 자전거 타면 시원하고 건강해 질텐데 생각하는 사람과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열심히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건강해져야한다고 생각만 했지, 정작 운동하지 않았던 저를 떠올리며 우물에 가득 메워진 것을 보면서도 파내지 않았던 저를 보는 것 같아 회개하게 됐습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도 속상한 일인데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있고, 답답한 일투성이인데 그냥 시간이 흘러가면 잘 되려니 생각만 한다면 자전거를 바라보며 타면 좋을 텐데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막힌 곳으로 가서 직접 파내야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파낼 것인지 모른다면 힘과 수고의 낭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흥이라는 큰 주제를 두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흥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파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푸는 말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유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생기는 일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대부분 예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되는데, 역사를 살펴면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사(敎會史)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고 잡동사니를 던져 넣어 물을 못 긷게 만드는 일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전 중세교회의 암울한 시대가 그렇습니다. 평양 대부흥 운동 전 한국이 처한 상황도 암울했습니다. 16-7세기 스코틀랜드의 대부흥. 복음이 미국으로 전해진 후 조지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있기 전에도 영적 우물이 막혀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 없어 보이는 암울한 시대를 그냥 두지 않으시고 다시금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하나님이 암울한 시대에서 부흥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부흥을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우물을 가득 메운 온갖 더러운 것들을 다 파낸 후에야 부흥의 시대를 맞게 해주셨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 담당했던 청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갑자기 가장 역할을 해야되서 대학도 포기하고 직장에 다녀야 하는데, 교회 가는게 너무 소모적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 나오면 밥이 나오냐는 겁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열정도 넘치는 청년의 마음에 돌덩이가 놓이자 암울한 상황만 이어졌던 겁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전 신앙생활을 이어가면 밥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밥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부흥을 경험하면 자신감과 열정을 회복하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성공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과 뜨겁게 만났던 그 부흥의 날을 다시 겅험하길 원한다면 막힌 것들을 파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파내야 한다고 외치기 전 무엇을 파내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진리

사악한 이들이 가장 먼저 감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초입니다. 속상하지만, 요즘 시대를 보면 하나님은 철학자들의 신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철학자들은 신을 초월적, 추상적 개념으로 만듭니다. 원인 없는 원인 등 모호한 말로 하나님을 감춰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보다 이성을 더 높은 곳에 둡니다. 하나님은 추상적,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초월해서 아득한 곳에서 우리를 바라보다 가끔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내재(內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신론(理神論)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신론은 한마디로 합리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합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합리적, 이성적으로만 보려는 경향은 문제가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허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증명해보라고 말합니다. 이해시키면 신앙을 갖겠다고 말은 하지만, 거들먹거리며 교회를 우스갯거리로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구원받은 것, 영생을 얻은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내 꼴은 내가 제일 잘 압니다. 내가 살아온 결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 구원이며 생명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되면 믿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오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설명이 됩니까? 부모의 한없는 사랑도 설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합리를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처음 만났을 때 죄를 회개하고 흘렸던 뜨거운 눈물은 결코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머리 안에 넣고, 판단의 대상으로 만드는 악한 마음이 바로 사탄이 우물에 던져 막아버린 정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지만, 초월해 계시고 당장 다가오시지 않기에 행동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항상 하나님을 인간 쪽으로 다가와야만 하는 분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감동시켜보세요. 나에게 복을 줘보세요. 왜 이렇게 나에게 무례하고 성의가 없으세요?’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신론입니다.

기도는 실제로 거의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시간낭비요 아주 우스워 보인다고 합니다. 소리내고, 울부짖는 기도가 신비요 주술입니까? 아니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가 드러나는데 어찌 괴롭지 않으며, 간절한 소망과 간구를 하며 부르짖지 않을 수 있습니까? 속상하고 안타까울 때도 번듯하게 묵상으로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우리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가두지 않길 바랍니다. 찬양과 기도의 능력을 말하지만, 영화관에 앉아있듯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신론에 물들면 교회의 활동이 형식과 기계적인 일이 되며 생생한 접촉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또 하나님은 영원한 세계로 추방되고 교회는 인간의 무대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은 실재하시며 지금도 일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논리와 이성으로 가둘 수 없는 창조주십니다. 혹 우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긴 하되 침입하지 않는 하나님으로, 내 생활은 터치 하지 않는 젠틀(?)한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진 않습니까? 막힌 우리의 우물에서 하나님을 잊게 하는 쓰레기를 치우길 바랍니다.

 

2. 성경의 권위

블레셋인들이 메워버린 쓰레기 중 하나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하는 악한 마음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탐구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찾아주셨고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해주신 책입니다. 물론 인간의 사상과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되긴 했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이 전달된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과 같은 사악한 자들은 이 권위를 부인하게 만듭니다.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니 읽지 않습니다. 몇 천 년 전 사람과 과연 내가 무슨 상관있는가? 허무맹랑하고 비과학적, 비합리적인 사건들, 날조되고 왜곡됐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결코 부흥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고백은 과학적으로 전혀 입증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성탄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을 믿지 못하게 하고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 모습을 보고 우물을 막아버린 블레셋인들은 지금도 쾌재(快哉)를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와 말씀의 은혜가 회복될 때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부흥이 찾아옵니다.


3. 인간에 대한 사랑

신학을 공부할 때 신론(神論)만 배우지 않고 인간론(人間論)이라는 과목도 배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인간에 대한 탐구가 분명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의 우물 안에 인간에 대한 오해의 돌덩이를 마구 던져 넣어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기본적인 항목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죄()와 하나님의 진노(震怒)라는 교리만큼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꺼리는 교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분,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분, 광야에 길을. 사막에서 물을 내시는 분 등등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셔야 하는 하나님은 인정하고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한 나, 배반하고 기만하던 나, 게으르고 나태하며, 때론 한없이 이기적인 나에 대해 책망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선 철저하게 눈을 감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교회가 성장하다 보니 교회 안에 격려와 위로는 있는데 책망과 징계, 심판을 담는 설교와 가르침은 거절하며 거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염치(廉恥)가 없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한 저부터 회개합니다. 사랑받아야 할 존재 이전에 말로 담지 못할 죄와 벗하며 누렸던 것을 잊은 채 겉만 번지르르 차려입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도 하나님께 나가면 용서하시고 품어주시는 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는 인색하며 복에 대해서만 집착하지는 않았습니까? 폭력과 전쟁, 나를 힘겹게 하는 상황과 배려 없음에는 철저하게 분노하면서도 나의 엇나간 삶에는 눈감아 버리는 죄성이 여전히 우리 안에 기세를 더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나의 꿈을 실현시키는 놀이터가 아닙니다. 이런 무지하고 악한 우리를 거듭 양육하시는 인큐베이터입니다. 나를 위한 성공이 아닌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부흥을 맛보려면 죄로 더럽혀진 나, 우리에게 눈감던 이중적 신앙을 벗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우린 분명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결코 우쭐하거나 교만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시작하며 찬양한 가사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밟는 모든 땅 주를 예배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덮어지게 해소서.

내가 선 이곳 주의 거룩한 곳 되게 하소서. 주의 향기로 물들이소서. / 주님만 날 다스리소서.

 

철저하게 수동입니다. 은혜와 부흥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은혜의 자리에 최선을 다해 다가가야 하는 능동만 있을 뿐입니다. 무언가 나도 역할을 해보고 싶지만, 결코 내 힘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 앞에서 이런 존재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설 때 비로소 주의 부흥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어긋난 우리의 자기애(自己愛)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회복게 하게 되길 축복합니다.


닫는 말

지금도 블레셋으로 가장한 사탄은 우리의 생명수가 담긴 우물에 각종 쓰레기를 넣고 있습니다.

1)하나님에 대한 진리 2)성경의 권위 3)인간에 대한 사랑을 왜곡하고 그 진리를 부인하며 혐오하게 하는 블레셋인들의 악한 행위를 분별하고 메워진 흙과 쓰레기를 퍼내길 바랍니다.

18세기 미국의 영적대각성 운동을 이끌던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낮아지며 엎드리지 않는 한 부흥의 소망은 없다.

부흥이라는 강력한 축복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우리의 오만이며 교만입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그 사랑을 다시 확인합시다. 그리고 더디더라도 메워진 것들을 파내는데 함께 수고합시다.

열매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꽃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미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비록 땀과 고통, 시간과 불편이 따르겠지만 결국 은혜 베푸실 하나님을 다시 만나길 축복합니다.

(IP : 121.164.146.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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