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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9 - 아버지의 계절(사무엘기하 15:30)
최영모 [beryoza]   2022-05-22 오후 5:35:19 320

09다윗 - 아버지의 계절(사무엘기 하 15:30)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유대교의 랍비인 데이비드 울프는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쓸 때 다윗 이야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국에서는 매년 4월이면 교회에서 <사무엘기>를 읽는 전통이 있었는데, 4월에 태어난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생일 무렵마다 다윗 이야기 낭독을 들었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훗날 자신의 작품 인물을 구상할 때 과거에 들었던 다윗 이야기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특히 햄릿의 우유부단함은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흐지부지했던 다윗에게서 얻은 통찰로 봅니다(<문제적 인간, 다윗>, 85).

 

지난 주일에는 남편으로서의 다윗을 보았는데, 오늘은 아버지로서의 다윗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다윗은 19명의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딸의 이름은 다말이고, 첫째아들은 암논입니다. 암논은 다윗 왕의 뒤를 이을 왕세자였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며, 형제들은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암논은 자기의 충동과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일을 저질렀어요.

암논은 이복 누이 동생 다말을 사랑하였지만, 누이에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상사병에 걸린 암논에게 교활한 사촌 형제가 하나의 계략을 말해줍니다. 암논은 그 계략에 따라 앓아누운 척하고 있으니까 아버지 다윗이 문병을 왔어요. 그는 아버지에게 요청하여 누이동생 다말이 와서 빵을 만들어 자기에게 직접 먹여주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러면 몸이 나아질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고요. 좀 이상한 느낌이 들지만, 아들을 워낙 사랑했던 탓에 아버지는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은 다말은 오라버니 집으로 갔습니다.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암논에게 주자, 암논은 다말만 남고 모든 사람은 다 방에서 나가라고 했어요. 그리고 다말을 가까이 오게 하여 끌어안았습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다말은 암논에게 제발 이러지 말라고 사정하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욕정에 사로잡힌 암논에게 다말의 말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누이의 말을 무시하고 암논은 다말을 겁탈하고 맙니다. “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니, 암논은 갑자기 다말이 몹시도 미워졌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하였다.”(삼하13:15) 암논이 갑자기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인지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수련 수도사 아드소는 한 여자와 환희에 찬 섹스를 합니다. 그런 후에 욕망의 허망함과 갈증의 사악함에 눈을 뜨면서, ‘짐승이란 무릇, 교미를 끝내고 나면 쓸쓸해지는 법이라는 라틴어 격언을 생각하지요(상권, 465).

다말을 잔인하게 겁탈한 암논 역시 욕망의 허전함과 갈증의 사악함을 느낀 것일까요? 그런데 암논은 슬픔보다는 분노에 가득 차서 다말을 비난하며 당장 나가라고 소리칩니다. 다윗 왕은 이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 몹시 분개하였다.”(삼하13:21) 그러나 다윗은 분개만 하였을 뿐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밧세바의 사건으로 아들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기에 아들을 훈계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왕의 식탁에서 다말은 사라졌고, 압살롬은 아버지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계속 기다렸지만 다윗은 그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으며, 암논은 여전히 모든 특권을 누리면서 왕궁을 활보하고 다녔습니다. 2년 동안 묵묵히 분노와 원한을 삼키고 있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는 아버지를 믿을 수 없어 자기가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봄이 되어 압살롬은 잔치를 베풀고 암논을 비롯한 모든 왕자를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잔치 자리에서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하고는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그술 왕국으로 피신했습니다. 압살롬의 친어머니가 그술왕의 딸이었기에, 압살롬은 외가의 나라로 도망간 것입니다.

 

3년 후 다윗은 그술로 피신했던 압살롬이 그리워지면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합니다. 그러나 왕궁으로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압살롬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자기 집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2년이 흘러갔지만, 다윗은 여전히 압살롬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요압이 나서서 다윗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받아달라고 요청했고, 그제야 디윗은 압살롬을 만납니다. “왕이 압살롬을 불렀다. 압살롬이 왕에게 나아가서, 왕 앞에서 얼굴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자, 왕이 압살롬에게 입을 맞추었다.”(삼하14:33)

누가 압살롬의 입을 맞추었습니까? 입을 맞춘 주어는 아버지가 아니라, 왕입니다. 이 구절에는 왕이라는 단어가 무려 네 번이나 나옵니다. 5년 만에 겨우 만나주면서도, 아버지로 만나주기보다는 왕으로 만나주는 느낌입니다.

히브리어 단어를 자세히 연구한 한 학자는 이 문장에 사용된 전치사를 보면서, 다윗이 다정하게 압살롬의 볼이나 이마에 입을 맞춘 것이 아니라, 친밀감이 훨씬 떨어지는 손에 입을 맞춘 것이라고 합니다. 압살롬은 그러한 아버지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다윗은 왜 이렇게 아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못을 박을 정도로 싸늘하게 했을까?’ 한 주간 내내 이 질문으로 묵상도 하고, 주석이라든가 관련된 책을 찾아보았어요. 그러나 흔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그랬을까?’ 하고 묵상하는 동안, 깨달은 것은 이러한 다윗이 저와 흡사하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저도 아들과 의견이나 가치관의 차이로 충돌한 적이 몇 번 있었어요. 그리고 그럴 때 제 입에서 뱉어낸 말은 아들의 가슴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고 냉정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생애에서 가장 후회할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때 나는 왜 아들에게 그랬을까?’ 하고 다시 또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딱히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냥 라는 존재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밖에는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로서 어쩌지 못하는 답답함이 여전히 저의 내면에서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를 설교하면서도 저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집을 나가고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던 아들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아버지.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꼭 안아주고, 잔치까지 열어주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입니다.

 

아들아, 네가 누이동생 다말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의 딸 이름을 다말이라고 지은 것을 보면서 알았다. 암논이 저지른 일에 대해 내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서 많이 서운했지? 미안하다.”

아들아, 그술에서 보낸 3년 동안 많이 힘들었지?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뎌냈니?”

아들아, 예루살렘 이 작은 도시에서 너를 2년이나 보지 않고 지낸 나를 용서해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런 말만 했더라도 이후에 일어날 가정의 비극도, 다윗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간도,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도 모두 없었을 것입니다.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말하다가 성경기록자는 느닷없이 아들 압살롬의 외모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온 이스라엘에, 압살롬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미남은 없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는 머리숱이 많아 무거워지면, 해마다 연말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는데, 머리를 깎고 나서 그 머리카락을 달아 보면, 왕궁 저울로 이백 세겔(2kg)이나 되었다.”(삼하14:25,26)

사람들이 칭찬하는 아들을 아버지만은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후에 일어날 쿠데타에 대하여 미리 복선을 깔아두는 것일까요?

사실 성경에서는 신체의 묘사를 구체적으로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압살롬은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미남이라는 칭찬을 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외모가 훌륭하다는 말을 할 때는 대체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게다가 머리숱까지 많았다고 해요. 하지만 나중에 압살롬은 많은 머리숱 때문에 전쟁 중에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대개 보면 잘생겼다는 칭찬을 많이 듣는 남자들은 착각도 잘합니다. 여자가 조금만 잘해주면 자기를 좋아해서 잘해준다고 착각해요. 여자가 싫다고 말하지요. 그럴 때는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괜히 튕긴다고 착각합니다.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여자가 다 넘어올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온 이스라엘에서 칭찬이 자자한 미남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압살롬이 자아도취에 어느 정도 빠져있었다는 의미일 수 있어요. 그런 성향이면 아버지의 쌀쌀맞은 행동에 더 크게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나이 마흔이 되자 압살롬은 왕의 자리에 오르려는 정치적 준비보다는 쿠데타로 방향을 정했어요. 그는 치밀하게 준비한 뒤에 헤브론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모두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졌습니다.”(삼하15:11) 하는 소문이 다윗에게 보고 되었습니다.

아들이 반역을 일으킬 때 많은 백성이 아버지가 아닌 아들에게로 마음이 기울어졌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윗은 세종대왕처럼 선정을 베풀었고, 그래서 많은 백성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을 거라는 우리의 생각에 균열이 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과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봅니다.

쿠데타 소식에 다윗은 왕궁을 지킬 후궁 열 명만 남겨놓고는 가족과 신하들을 데리고 급히 피신했어요. 후궁들이 무슨 수로 왕궁을 지키겠습니까?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다윗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은 이전에는 아버지라고 불렀던 사울에게 쫓기는 도망자가 되었는데, 이제는 아들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올리브 산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는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울고, 머리를 가리고 슬퍼하면서, 맨발로 걸어서 갔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삼하15:30)

 

압살롬이 이끄는 군대는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자신이 이제 최고 권력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윗이 남겨두고 간 후궁 10명과 왕궁의 옥상에서 성관계를 하였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곳 옥상은 다윗이 밧세바가 목욕하고 있던 장면을 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옥상에서 후궁들을 불러 압살롬에게 성적인 쾌락을 제공하도록 제안했던 이는 밧세바의 할아버지 아히도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처절한 패배의 순간에, 절망의 어두운 그늘로 떨어지고 있을 때, 다윗의 내면에는 무엇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어요. 광야로 쫓겨가면서 다윗은 왕의 자리에 있을 때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금 찾고 있습니다.

먼저 찾은 것은 기도입니다. 도망가면서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붙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삼하6:23) 이럴 정도로 아히도벨은 매우 현명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어요. 다윗도 무엇인가 지혜가 필요하고 결단해야 할 상황에서는 기도하는 것보다 아히도벨의 의견을 먼저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 더 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아히도벨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신했습니다. 배신 소식을 듣자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부디, 아히도벨의 계획이 어리석은 것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도망치면서 고통과 기도의 밤을 배경으로 쓴 시편 3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님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이 시편 역시 주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동안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말을 먼저 듣곤 했지만, 이제 기도를 회복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다시 눈을 떴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지혜로운 사람의 말도 들어야 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도망가는 다윗 일행이 바후림 마을을 지나갑니다. 혹시 기억하세요? 다윗이 미갈을 빼앗을 때 그 남편 발디엘이 울면서 아내를 따라오다가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돌아선 곳이 바후림이었지요. 그 마을에서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오더니 다윗에게 돌을 던지면서 마구 저주를 퍼붓는 것입니다.

영영 가거라! 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이 불한당 같은 자야! 네가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주님께서 그 피 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 이제는 주님께서 이 나라를 너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 주셨다. 이런 형벌은 너와 같은 살인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재앙이다.”(삼하16:7,8)

기가 막힙니다. 아무리 도망가는 신세이지만, 한 사람이 나와서 이런 저주를 퍼붓는데, 참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에게 아뢰었다. ‘죽은 개가 높으신 임금님을 저주하는데, 어찌하여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제가 당장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잘라 버리겠습니다.’”(삼하16:9)

기도를 회복하고 나면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자신을 알게 되면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루야의 아들아, 나의 일에 너희가 왜 나서느냐?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그가 나를 저주한다고,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삼하16:10)

그런 다음에 다윗이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에게 말하였다. ‘생각하여 보시오. 나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도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하물며 저 베냐민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혹시 주님께서 나의 이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 한 저주 대신에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삼하16:11,12)

다윗 일행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니까 시므이는 계속 다윗을 따라오면서 저주하며, 돌을 던지고, 흙먼지를 뿌렸어요. 그러나 다윗은 묵묵히 참아냅니다. 기도를 회복하게 되면 여유가 생깁니다.

 

마침내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일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싸우러 나가는 장군들에게 다윗이 이런 부탁을 하는 거예요. “나를 생각해서라도, 저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주시오.” 압살롬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웠고, 자신은 그 아들에게 황량한 광야로 쫓겨났으며, 지금은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아들 아닙니까? 이름대로 압살할 놈인데, “나를 생각해서라도, 저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주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내용을 묵상할 때, 저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너무나 우유부단했고, 너무나 냉정했으며, 너무나 무관심했던 다윗이 비로소 아버지가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욕하는 군중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사랑도 떠올랐습니다.

이제 다윗은 완전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압살롬이 싸우다 죽었다는 말을 들을 때 다윗은 왕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어 울부짖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아들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외치는 아버지다윗에게서 돌아온 탕자를 보고 달려나가 어루만지는 아버지가 보입니다.

다윗에게 아버지로서의 계절은 한없이 슬프고 추웠습니다. 순간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밧세바를 탐했기에 갓 태어난 아이를 잃었고, 우유부단했기에 사랑하는 암논을 잃었으며, 냉정했기에 잘생긴 압살롬을 잃었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다윗은 이렇게 여러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자식을 사랑하면서도 정작 어떻게 사랑하는지 방법은 모르는 불쌍한 아버지였습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면서 우리를 찾으려고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살릴 방법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는 수밖에 없기에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됨이 참 힘들구나하고 느끼십니까? 맞습니다. 힘듭니다. 만일 별로 힘든 것을 모른다면 미안하지만 여러분은 아직 아버지 됨의 깊은 고민이 없었다는 말이겠지요. 어떻게 해야 좋은 아버지가 되는지 세월이 지나도 모르시겠습니까? 당연합니다. 아버지 노릇을 연습해보고 다시 한다고 해도 여전히 시행착오를 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를 교회에서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정에서 한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가정 예배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식사시간마다 성경 구절을 먼저 읽으십시오.

마침 지난 주간 성경 암송 구절이 에베소서 64절이었어요.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아론의 후손은 유대인의 혈통으로 지금까지 3,500년을 이어 내려옵니다. 그런데 모세의 후손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세는 40세까지 이집트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자녀 교육에 철저한 유대인의 전통에 익숙하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비록 아버지 됨이 서툴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말씀대로만 따라가면 행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자녀들에게도 한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자녀는 하나님도 경외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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