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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목격자 - 바라바 (마가복음 15:6-15)
김우영 [ready4god]   2021-03-28 오후 9:05:51 178

20210328 433 귀하신 주여 

 

십자가의 목격자 - 바라바

 

마가복음 15:6-15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선동하여,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여는 말

아파트 입구에 난방이 잠시 멈춘다는 공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녹슨 온수배관을 손볼 만큼 날씨가 푸근해졌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이 뚫린 것같이 눈이 온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 끝이 보이는듯합니다. 물론 4월 말까지도 눈이 내렸으니 아직 완연한 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한껏 봄이 보이는듯해 마음이 좋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에 나오는 구절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경칩 무렵겨울잠에서 깨어나 땅의 천정을 열고 나오는 개구리들 (중략). 개구리들의 이마에는 상처가 나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중략). 생명은 은총이지만, 그 은총은 무턱대고 주어지지 않는다. 자연은생명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금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마에 난 상처가 바로 개구리가 스스로를 도왔다는 증거다. 상처가 나지 않은 개구리들은 새 봄을 맞지 못하리라.

경칩(驚蟄)을 맞아 깜짝 놀라 땅에 튀어나오는 개구리는, 천정을 뚫고 나오느라 이마에 봄 상처가 났을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이 됐습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가 안에서 껍질을 쪼아대며 안간힘을 써야 하고, 또한 어미 닭이 밖에서 같이 껍질을 쪼아줘야 합니다.

 무디 목사님이 대서양을 건너가는데 배 안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한 승객이 배 안에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 목사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불이 났습니다. 기도 좀 해주세요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황급히 일어나면서 말했습니다. “물동이부터 가져와요. 불부터 끄면서 기도해야지요.”

만약 그 상황에서 기도만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불을 끄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결코 우리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봄을 맞는 개구리도 이마에 상처를 무릅쓰고 수고하듯, 인생의 봄을 기다리는 우리도 동일하게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깊게 묵상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서 봄 같은 은혜를 누리겠다는 것은 욕심입니다. 서늘한 봄을 보내며 그저 따뜻해지기만을 바라지 마시고, 이마에 상처 난 개구리처럼 우리도 함께 힘과 마음을 같이 해서 우리를 덮고 있는 두터운 겨울을 벗겨내는 수고를 해야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살펴보며 두터운 겨울처럼 우리를 가리는 좁은 시선을 벗겨내 십자가의 목격자로 바로 서는 은혜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푸는 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이 사건과 연루되어 목격한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그 중 쉽게 들어나지도 않고 간과하기 쉬운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바라바입니다.

요한복음 21:25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절입니다. 성경에 기록할 인물이나 사건들을 엄선하고 또 엄선해서 기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건이나 인물들이 계속해서 각 복음서마다 계속 등장한다면 그 안에는 굉장한 의미와 교훈이 담겨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기적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님이 물위로 걸으신 기적입니다.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중요한 사건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기사가 있습니다. 성목요일 만찬부터 다음날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이는 기독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 연관된 기사에 계속 등장하는 의외의 인물인 바라바가 있습니다. 여러분, 바라바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 대신 풀려난 강도 정도로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주시는 교훈은 가볍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7:16 그런데 그 때에 [예수] 바라바라고 하는 소문난 죄수(유명한 죄수)가 있었다.

마가복음 15:7 그런데 폭동 때에 살인을 한 폭도들과 함께 바라바라고 하는 사람이 갇혀 있었다.

누가복음 23:19 바라바는, 그 성 안에서 일어난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이다.

요한복음 18:40 그들은 다시 큰 소리로 그 사람이 아니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하고 외쳤다. 바라바는 강도였다  

위의 증언들을 토대로 볼 때 바라바는 요즘말로 잡범이 아니라, 시위를 주도하고 사람을 죽인 소문난 강도였습니다. 그런데 실상 그는 로마의 식민지 상황에서, 마치 일제강점기에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의혈단처럼 강경하게 독립운동을 하던 엣세네 공동체의 리더였습니다. 로마에 대한 그들의 투쟁은 매우 과격했습니다. 요인을 암살하고, 시위를 주동하며 관공서 습격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물론 명분이 폭력과 살인은 미화할 순 없겠지만, 단순히 강도라고 말하긴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 등을 보면 빌라도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 당시 유대에서는 두 번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먼저는 빌라도가 부임하자마자 황제에 대한 충성도를 보이기 위하여 황제 숭배 정책을 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억압의 상황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유일신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도전받는 우상숭배를 강요받자 목숨을 걸고 항거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폭동은 지중해 해안도시 가이샤라에 소위 수문 건축을 시도하는데, 건축비용이 많이 들자 그것을 유대인들의 세금으로 충당하려 했고, 이에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자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대규모 시위로 번졌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빌라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정적들에 의해 계속해서 로마 중앙정부에 보고되고, 이런 일들이 지속될 경우 빌라도는 소환당할 위기를 겪게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재판 때 양심의 증거와 아내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민란이 두려워 손을 씻고 예수님을 성난 무리들에게 넘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 바라바는 세 가지 중요한 선택을 경험하게 됩니다.

 

1. 바라바에 대한 빌라도의 선택

광복절이나 성탄절 특사처럼 당시 유대에도 큰 절기에 죄수를 놓아주는 사면제도가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총독 빌라도는 죄수 한사람을 석방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전에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고소된 상태였습니다. 빌라도는 이 고소가 부당했고 음모에 의해 잡혀온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석방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유대 지도자들과 군중들의 압력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양심의 선택이 아닌 자기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선택했습니다. 부당한 한 사람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다수를 위한 선택, 양심의 소리보다는 인기를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당연히 비난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그를 마구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선택이 그의 선택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운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신앙의 비겁자가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출석했다고 한지 수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영적인 어린 아이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따르기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신앙 양심보다 밥줄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보다 자기 안에 있는 사욕과 명예심을 따랐기 때문이며, 성령의 감동보다 편해지고 싶은 안일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확신과 고백을 따르기보다는 시대의 유행과 다수의 흐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시선보다 인간의 시선을 더 의식하기 때문에 올바른 구원의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다수가 반드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유행을 따르다보면 우리 마음속의 확신도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기가 반드시 정의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시선보다 인간의 시선을 의지하면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배워야 합니다. 전 세계 수십억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빌라도가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깨닫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진 않지만, 바라바는 빌라도의 이 선택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2. 바라바에 대한 군중들의 선택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수한 예루살렘 백성들은 환호하며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닷새 후에 그들은 그렇게 환영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닷새 동안에 이토록 변한 군중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들 나름의 이유는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라는 분이 나타나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지도자들의 죄를 가차 없이 책망하는 것을 보니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틀림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직. 간접적으로 자신이 메시야임을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메시야관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야를 보내셨지만 유대인들의 관점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억눌려 지내왔고, 약탈당해 왔고, 억울하게 지내왔던 역사 속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강력한 지도자로서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했던 다윗 왕의 후손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던 중 예수님이 등장하셨으니 사람들은 모두 틀림없다고 하며 좋아하고 환영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1:9-10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외치는 저들의 함성 속에는 과거 다윗시대의 영화를 회복시켜달라는 요구가 깊게 서려 있었습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로마를 쳐부수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며, 드디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꿈을 꾸며 좋아하고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상황을 보니 자신들이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활약을 기대했지만, 붙잡혀온 예수는 로마 병정 앞에 무력했고, 법정에 끌려와선 말 한마디 못하고 매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온갖 수모와 조롱을 당하면서도 꼼짝없이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는 군중들은 너무나도 실망했고 그 실망은 곧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살인자로 체포된 바라바를 보니 비록 방법은 선하지 못했지만, 나름 독립운동을 했던 그가 초라한 몰골의 자칭 메시아보다 나아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라바가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표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예수님을 보지 않고 내가 설정한 동기, 내 방법, 내가 세운 목표대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도 닷새 후에 저 군중들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쉽게 신앙을 버리고 가나안 교인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고백을 하고, 봉사와 다양한 섬김을 한다 할지라도 정작 우리가 원하는 것이 예수가 아니라 예수로 인한 영광과 축복이라면 쉽게 변심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군중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하는 이유가 단순히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면, 질병에서 고침받기 위해서라면, 사업 성공만을 위해서라면, 승진하기 위해서라면, 습관이기에 안 나가면 꺼림직하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변심한 후 못 박으라 외치던 군중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라바는 이런 군중들의 선택을 보며 많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3. 바라바에 대한 예수님의 선택

바라바가 석방되기까지 자기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빌라도와 군중들의 선택으로 정치게임에서 벗어났을 뿐입니다. 로마의 실정법을 어기고 현행범으로 잡혔던 바라바는 죽이면 죽는 것이고 살리면 사는 것뿐이지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억울하게 잡혀오긴 하셨지만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석방될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12a 이 말을 듣고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다.

빌라도는 내심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죄다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고소자들의 고발을 번복할 만한 증언만 하면 예수님을 석방시킬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위기를 모면한 변명을 하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0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만약 이때 예수님이 빌라도가 원하는 대답을 했더라면 그 즉시로 석방되고 반대로 바라바는 십자가에 처형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 빌라도가 가진, 살리고 죽이는 권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9:11a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

예수님은 빌라도의 결정에 의해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빌라도가 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수님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바라바는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주님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빌라도가 석방시키지 않아도 천사들을 명해서 십자가에서도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쓴잔을 기꺼이 마시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라바는 누구 때문에 살아난 것일까요? 빌라도의 선택인가요? 군중들이 그를 놓아달라고 외치며 선택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선택 때문입니다. 이 선택으로 바라바는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건을 멀리서 관전하듯 봐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바로 바라바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옳게 여기는 것을 혈기를 부리며 고집스럽게 살아왔던 우리였습니다. 타협 없이 내 주장대로 살아왔습니다. 때로 열심히 잘 살아보려 했지만, 날개 꺾인 새처럼 푸드득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런 나를 살린 것은 빌라도의 구부러진 선택, 군중들의 선택도 아닌 내 허물을 위해 침묵하시며 죽음으로 사랑을 보이셨던 예수님의 선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후일 바라바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 가시는 모습을 멀리서 보며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증거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내가 그 분을 죽인 겁니다.

 

닫는 말

어떤 신학자는 바라바를 가리켜 "그는 모든 인류를 상징하는 죄인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라바는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어두운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택으로 그는 그늘진 자리에서 새롭게 변화된 자리로 옮기게 됐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빌라도의 선택, 군중들의 선택, 그리고 예수님의 선택가운데 살아갑니다. 바라바는 이런 선택 속에서 십자가의 목격자로 살길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목격자였던 바라바처럼 자신의 이익과 명분, 내 뜻대로 선택하는 삶에서 벗어나 마땅히 죽어야 하는 나를 대신해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20:28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은 은총이지만, 무턱대고 주어지지 않습니다. 새봄을 맞는 개구리가 이마에 상처를 내며 흙을 뚫고 봄을 맞이하듯 우리들도 우리를 둘러싼 게으름과 무정함, 무기력과 편견, 고집과 교만을 뚫고 십자가의 목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수고하며 애쓰지 않으면 빌라도의 선택, 군중의 선택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라바와 같은 우리가 목격자가 되어 이어갈 신앙의 유산이며 진리입니다. 이 귀한 은혜를 누리며 새로운 봄을 맞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IP : 188.187.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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