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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부자 - 서머나교회(요한계시록 2:7-11)
최영모 [beryoza]   2021-03-21 오후 10:39:13 213

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두 번째 나오는 서머나교회는 칭찬만 받은 교회다. 그런데 칭찬의 뒤에는 극심한 환난과 궁핍과 비방을 힘겹게 견디어내야만 했던 고통이 따른다. 포도나무에 잘 붙어있는 가지이어야 그런 것들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참된 부자 - 서머나교회(요한계시록 2:7-11)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저를 따라 해보세요. “에서버두사빌라”- 방언도 아니고, 러시아어도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첫 글자입니다.

에서버두사빌라. 맨 처음 나오는 에베소교회는 주님께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렸어요. 주된 원인은 이단을 정죄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단을 정죄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면 자칫 사랑을 잃어버리기 쉬운 거예요. 형사는 범인 잡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그 일에 집착하면서 괴물이 되어가는 형사들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에서버두사빌라, 오늘 보게 되는 교회는 서머나교회입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서머나교회는 빌라델비아교회와 함께 책망을 듣지 않고 칭찬만 들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떤 교회들은 서머나나 빌라델비아를 교회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머나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라고 하십니다. 그 의미는 잠시 뒤에 보기로 하고요. 주님께서는 먼저 나는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무엇을 아시냐 하면,

 

1. 서머나교회가 당하고 있는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서머나교회는 왜 환난과 궁핍을 당하고 있을까요? 로마가 한 나라를 정복하면 대개는 정복한 나라의 문화나 종교를 거의 그대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유대 나라를 정복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유대교 신앙을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대해서는 달랐어요. 무자비하게 박해하였습니다.

왜 기독교는 이렇게 미운털이 박혔을까요? 몇 가지 원인이 있지만 가장 주된 것은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였다는 거예요. 황제는 신으로 추앙받던 시대여서 그를 위하여 종종 종교의식을 거행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거부하는 거예요.

그리고 로마가 통치하는 모든 지역에서 사람들은 가이사(황제)는 나의 주님이십니다하고 서로 인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상대방이 그렇게 인사를 하면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십니다하고 인사했어요.

그래서 로마는 기독교를 반국가적인 단체로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박해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네로 황제가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는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했다고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네로만이 아니라 여러 황제가 기독교를 엄청나게 박해하였습니다.

 

로마가 황제숭배를 위하여 신전을 세우려고 할 때 일곱 도시가 후보로 등장하였어요. 서로 자기 도시에 신전을 세우려고 각 도시는 치열하게 경쟁하였습니다. 신전이 세워진 도시의 통치자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있고, 도시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각 나라가 서로 유치하려고 경쟁하는 것과 같은 원리죠. 그때 쟁쟁한 경쟁을 물리치고 최종 선정된 도시가 바로 서머나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서머나는 황제의 신전이 세워진 최초의 도시가 되었어요.

서머나 시민들은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그들이 사용하는 동전에 이렇게 새겨넣었습니다. ‘The First City of Asia in Size and Beauty’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아시아 최초의 도시라는 말이지요. 그들은 최초라는 말을 대단히 좋아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표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동양 최초의 천문대,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 동양 최초의 동굴벽화, 아시아 최초의 컴퓨터 박물관, 우리 교회는 러시아 최초의 장로교회.

서머나교회는 최초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도시에 있는 교회이기에 주님께서는 내가 바로 처음이며 마지막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은 그 중간에 있는 모든 역사까지도 그분이 주관한다는 의미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로마의 황제도 아니고, 미국이나 러시아의 대통령도 아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비록 서머나의 모든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예술, 문학 등이 황제숭배에 맞추어 돌아가고 있지만 진정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서머나교회는 그것을 선포하기에 엄청난 환난을 겪는 거예요.

 

환난은 그렇다 치고 그럼 궁핍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서머나에는 상인들의 조합인 길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 길드에도 가입하지 않았어요. 길드는 장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황제의 신전에 기부금도 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일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였어요. 그래서 길드로부터 외면당하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장사할 수가 없었고, 조직이나 기관에 가입할 수가 없으니 경제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궁핍하였던 것이죠.

 

이집트에 콥틱교회라고 하는 기독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콥틱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좁은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면 언덕 위에 교회당이 있는데, 교회당으로 가는 골목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콥틱교회의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세 가지 인상을 받았어요. 하나는 그들의 집 안팎으로는 종이나 폐품을 잔뜩 모아 놓은 거예요. 쓰레기장에서 그런 것을 주워 모아 생계를 유지하는 거예요. 이집트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제대로 된 직장에서 일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에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본 또 하나의 인상은 모든 집마다 들어가는 문 위에 빨간 십자가를 그려놓은 것이었어요. 우리 집은 예수를 믿는 집이라는 것을 드러내놓고 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본 세 번째 인상은 교인들을 만나보니 팔목이나 손등에 십자가의 문신을 한 것이었어요. 십자가 목걸이나 반지는 때때로 벗을 수가 있지만, 문신은 쉽게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번 예수를 믿으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기에서 보았습니다.

 

몇 년 전이었죠. 이집트의 모슬렘들이 콥틱교회에 화염병을 던지며 불을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옆집에 사는 모슬렘들은 벽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서 그들을 감시하기도 하였어요. 그러니 얼마나 두렵겠어요. 이집트에 가시면 꼭 콥틱교회를 찾아가 보세요. 콥틱교회와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여러분의 신앙에 큰 울림이 있을 것입니다.

 

이집트의 콥틱교회처럼 서머나교회는 환난과 궁핍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세요. “사실 너는 부요하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늘 눈앞에는 위협이 있고, 장사도 못하며, 하루 먹고 살기가 힘든 사람들에게 실제로는 부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란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물질과 소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2:21에서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라고 하십니다. 재물이 많은 것과 하나님이 부요하다고 하시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이들 셋이 돌멩이를 갖고 놉니다. 한 아이는 다섯 개, 두 번째 아이는 두 개, 세 번째 아이는 한 개의 돌멩이를 갖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어 집에서 밥 먹으라고 부르면 돌멩이는 다 내버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돌멩이가 아까워서 부모의 말에 선뜻 순종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그 아이를 어떻게 보겠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부르시면 다 놓고 가야 하는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서, 하나님에게 인색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자라고 칭찬하실까요? 자기를 위하여 쌓기만 하고, 하나님을 위해 쌓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이렇게 반응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지 않아도 좋으니 이 땅에서 재물이나 많이 가지면 좋겠어요.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좋은 차, 좋은 집, 풍요함, 건강, 이런 것을 많이 누리면 좋겠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히브리서 11:24-26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과 이집트의 재물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대답하기 난처한가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욕을 받을 일은 하나도 없고 단지 이집트의 재물이나 많이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게으르고 미련하여 환난과 궁핍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교회가 당하는 환난과 궁핍은 그리스도 때문에 겪는 것입니다. 가난이나 궁핍을 무조건 예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겪는 환난과 궁핍은 아름다운 것이고, 귀한 것이며, 거기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서머나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알고 계시는 주님은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비방을 당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유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비방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세금을 잘 내면서 그들의 환심을 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상 신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일과 군 복무 면제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런 혜택이 박탈되지 않도록 늘 로마에다 로비하면서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눈으로 보면 유대교의 한 종파처럼 여겨지는 기독교가 황제의 신전에 세금도 안내고 황제숭배도 거부한다고 말하거든요. 로마의 눈치를 보고 있는 유대인들로서는 환장할 노릇입니다. 자칫하면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혜택을 박탈당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참 유대인이 아닌, ‘자칭유대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패스포트도, 그들의 출신 국가도 유대 나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가짜 유대인이라고 판결하십니다. 게다가 그들을 사탄의 무리라고까지 말씀하시는 거예요.

 

주님 때문에 당하는 환난과 궁핍, 유대인들의 모함과 비방을 주님께서 아셨으니 이제 그 모든 것을 없애주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세요.

여기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신앙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이겨나갈 방법을 알려주시는 분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라고 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수고와 무거운 짐을 없애주신다고 하지 않으시고, 가볍게 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거운 짐과 고난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지고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쉽게 실수하고, 힘만 빼면서, 낙심할 일이 많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환난과 궁핍, 그리고 유대인의 비방을 이기는 방법을 세 가지로 말하십니다.

 

1. 악마는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린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10).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거예요. 잘 믿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시험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마태복음 4:1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주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려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하여 싫은 사람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해도 술과 담배는 여전히 맛있을 수 있습니다.

악마는 시험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다운시키려고 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상승시키려고 하십니다. 하나의 사건이지만 악마는 우리의 믿음을 떨어뜨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하십니다.

코로나만 해도 그래요. 코로나를 통하여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더 멀어지고 게을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환난과 궁핍을 이기는 방법은 시험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악마가 나를 시험하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 앞에서 이것이 지금 하나님과 나 사이를 벌리고 있구나 하고 알게 되면 악마는 그 방법으로 더는 시험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악마의 시험을 알면 악마를 이길 수 있습니다.

 

2. 고난과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그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열흘 동안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어요. 10이라는 숫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완전한 기간을 말합니다. 환난의 기간이 열흘이라는 말은 정해진 기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수많은 상징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한은 왜 이런 상징어를 사용하였을까요? 요한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지금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편지를 써서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거예요. 편지는 섬 밖으로 나가면서 검열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편지에 우리를 박해하는 로마는 곧 멸망하게 되고, 우리는 이길 것이다하고 쓰면 검열에 통과될까요? 안되지요. 그래서 유대묵시문학의 스타일로 글을 쓰게 됩니다. 상징어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편지를 봐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무협지 소설인가 하면서 통과시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은 그것을 보면 무슨 의미인지 압니다. 그래서 열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서머나교회가 열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마도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받는 환난과 궁핍은 끝나는 날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는구나 하면서 용기를 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환난을 통제하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사나운 개라고 해도 줄에 묶여있으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난과 궁핍, 그리고 유대인의 비방도 열흘이라고 하는 줄에 묶여있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3. 환난과 궁핍과 비방을 이기는 방법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은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환난과 궁핍을 견뎌내는 서머나교회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생명으로 만들어진 면류관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은 없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성도가 불신자와 다른 점은 둘째 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육체로 죽는 것을 성경은 죽음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냥 잠들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성경은 단지 둘째 죽음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습니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나면 한 번만 죽습니다. 육신만 태어난 사람은 육신도 죽고, 영혼도 죽습니다. 영혼이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완전하게 단절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두 번 태어난 사람, 거듭난 사람은 육신의 죽음만 있을 뿐, 영혼은 영원히 삽니다.

서머나교회에서 환난과 궁핍을 이겨내고 생명의 면류관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그는 체포되었고, 화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서머나의 총독은 폴리갑에게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황제가 나의 주님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였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이렇게 말하였어요. “나는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겨 왔지만, 그분은 한 번도 나를 해롭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폴리갑은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둘째 사망이 그에게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런 서머나교회에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가장 오래 왕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영조입니다. 재위 기간이 무려 52년이나 되었던 왕입니다. 사람이 오래 살면 생각하는 것도 많아지나 봐요.

요즘 보니까 <100세를 살아보니>라는 책에서 김형석 교수께서도 나이 들면서 생각하는 것이 많은 것 같아요. <80년 생각>이라는 책에서 이어령 교수께서도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있고요.

영조는 오래 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의 복이란 무엇일까?’ ‘사주와 팔자는 맞는 것일까?’ 그래서 66세에 손녀뻘 되는 정순왕후를 맞아들이던 해에 전국에 다소 엉뚱한 명을 내렸습니다. 영조 자신과 똑같은 사주를 가진 백성이 있는지 찾으라는 것이었어요.

마침 강원도 산골에 영조와 똑같은 사주를 가진 농부가 있었습니다. 영조는 농부를 불렀어요. 그리고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검게 탄 얼굴, 초라해 보이는 행색, 거칠어진 손을 가진 농부를 보면서 말하였습니다. “나와 너는 똑같은 사주인데, 어떻게 나는 왕으로, 그리고 너는 가난한 농부로 살 수 있을까? 인간의 복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때 농부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께서는 조선 8도를 다스리시는 것처럼, 소인은 8두락의 전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하에게는 삼정승과 육조판서가 있는 것처럼, 소인에게는 세 아들과 여섯 손자가 있으니 사주가 전혀 허황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면서 농부는 덧붙여 말합니다. “전하께서는 국사에 심히 노고가 많으시지만, 소인은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기니 오히려 평안하옵니다. 이제는 집안일까지 늙은 아내와 아들 며느리에게 맡겨두고 한가로이 여생을 즐기고 있사오니, 이만하면 괜찮은 팔자가 아닐는지요.”

그 말을 듣고 영조는 한동안 농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인의 복락이 너보다 못하구나.” 하면서 비단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사실 아들 사도세자까지 뒤주에 가두어 죽인 아버지 영조의 생이 결코 편할 리는 없었겠지요.

누가 참된 부자일까요? 영조일까요? 아니면 시골 농부일까요?

누가 참된 부자일까요? 자기들이 누리는 혜택을 상실할까 두려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유대인일까요? 아니면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 주님의 위로를 듣고 있는 서머나교회일까요?

누가 참된 부자일까요? 박해하는 로마의 황제와 총독일까요? 화형으로 순교하는 폴리캅 감독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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