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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디모데전서 2:1)
최영모 [beryoza]   2021-02-28 오후 4:39:50 236

어떤 이들은 중보기도라는 용어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보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중보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를 일반적으로 중보기도라고 하기에 여기서는 익숙한 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정확하게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이다.


중보기도(디모데전서 2:1)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입된 나쁜 생각 가운데 하나는 나는 바쁜 사람이라고 해야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중요한 사람으로 본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일이 많고, 갈 곳이 많고, 만날 사람이 많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꽤 성공한 사람이고 지위도 있어 보인다고 생각할 거라는 거예요.

그러나 바쁜 삶은 자칫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에 소홀하게 됩니다. 기도가 소홀해지는 것은 마치 두 귀를 막고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고 싶은 말을 듣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바울의 회심하기 이전 이름)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손을 잡아 주어야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었어요. 하나님은 그 지역에 있던 신실한 성도인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로 가라고 하시면서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기쁨으로 차 있는 듯합니다. 마치 봐라! 사울이 기도하고 있잖아.” 하시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분위기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십니다.

 

오늘은 기도 중에서 특히 중보기도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중보기도란 내 문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런 자격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장이란 백성의 죄를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는 직분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권리와 의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중보기도는 신자에게 매우 중요한 기도입니다.

 

김일성이 북한을 통치하던 시대에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면 북한은 무너지고 남북은 통일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보기도를 하였지만, 통일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 김정일이 통치하던 시대에도 그렇게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고, 이제는 손자인 김정은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은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통일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9,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수많은 교회가 중보기도를 통하여 비폭력 평화혁명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 중 동독에 속했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는 4개의 교회가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함께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통일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목장 모임처럼 그들의 모임도 처음에는 몇 사람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참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하였어요.

기도가 끝나면 모인 사람들은 손에 작은 촛불과 깃발을 들고 도시의 어두운 거리를 행진하였습니다. 호응하면서 모여든 사람들은 차츰 수만 명, 그리고 수십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한국에서도 몇 년 전에 촛불 혁명이 있었지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모인 그들은 먼저 기도하고 나서촛불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와 달랐어요.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정부는 위협을 느낀 나머지 행진할 때 발포하라는 명령까지 내렸지만, 어떤 이유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상은 사임하고 러시아로 망명하였습니다. 마침내 동독은 무너지고 독일은 통일되었습니다.

그날을 회고하는 동독인들은 기적이라고 하면서 말합니다. “기도가 정말 산을 움직일 수 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그것이 라이프찌히의 사람들을 움직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한 놀랍도록 평화로운 분위기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라이프찌히에서처럼 중보기도가 위력을 발휘하며 응답 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북통일의 경우처럼 기도 응답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중보기도를 어렵게 생각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중보기도의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사는 소돔성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언자들인 사무엘, 엘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도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다윗과 히스기야도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중보기도를 여러 번 하셨습니다.

바울은 아예 서신서들마다 거의 중보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1을 보세요. 바울은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권면한다라고 하였어요. 바울은 우리가 중보기도 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중보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어느 미국인 선교사의 경험입니다. 오지에서 사역하던 그는 어느 날 몹시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 날 동안 열은 매우 높았고,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어요. 이러다가 죽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느 순간 신기하게도 열이 뚝 떨어지고 몸은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그렇게 높은 열로 시달렸지만, 어느 순간 열이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증하였어요. 예배를 마치고 나자 한 할머니가 선교사에게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열이 내린 날이 어느 날이었습니까?” 선교사가 어느 날이라고 말하자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였어요.

어느 날 아침에 기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니까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랍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이라 생각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기도 수첩을 꺼내어놓고 그날에 기도해야 할 선교사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하였답니다. (미국의 많은 교회에서는 매일의 기도 수첩에 그날 기도해야 할 선교사의 이름과 기도 제목을 적어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가정기도 가이드에 그날의 기도할 사람 명단을 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그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한 날이 바로 그 선교사가 고열로부터 회복이 되던 그날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중보기도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를 제대로 해보기 전이나 아니면 중보기도의 초보 시절에는 중보기도를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의 문제를 하나님께 알려드리는 것이 중보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무개가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중보기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중보기도를 진실하게 하다 보면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나의 눈을 열어 주님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의식은 민감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사로잡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에게 더 유익할까요? 바로 중보기도 하는 나에게 더 유익합니다. 중보기도는 대상자에게도 유익하지만, 기도하는 나에게 훨씬 더 크게 유익한 거예요.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사실은 나에게 좋은 것이 됩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 자기 일에만 분주한 채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얄밉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를 위하여 기도하다 보면 그가 매우 여유 없이 쫓기듯 사는 불쌍한 존재로 보입니다. 중보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눈으로 그 사람을 보게 되면 그의 무질서한 행동을 비난하기보다는 긍휼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한 변화는 중보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매우 인색한 친구가 있습니다. 자기 돈은 거의 쓰지 않으려고 하고, 늘 상대방이 돈을 내도록 유도합니다. 이런 친구도 얄밉지요? 그 친구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하다 보면 그 친구는 돈 문제로 힘들어하는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불쌍하고 긍휼히 여기게 되면 주님께서는 바로 나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이렇게 되면 중보기도를 할 때 누가 더 복을 많이 받게 됩니까? 바로 기도하는 나 자신이 더 복을 누리게 됩니다.

 

매일 아침 가정기도 가이드에 실린 이들을 위하여 우리는 중보기도를 할 수 있어요. 이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큰 복입니다. 기도자의 이름과 기도 제목을 그냥 읽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로 갖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참 크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행동은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때로는 내 문제를 갖고도 중보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아이 빌리브> ‘나는 믿는다라는 영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인공 소년은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인공 소년의 얘기가 아니라, 그 소년이 예배당에서 만난 한 군인 장교 대위의 얘기입니다. 그는 아프칸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부상으로 다리가 절단되었고, 그래서 휠체어를 타고 다닙니다. 소년과 대위가 만나고 나서 소년이 떠난 뒤에 그 대위가 드리는 기도가 저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대개 하나님, 제 다리를 고쳐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대위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 아내가 상처받지 않게 해주세요.”

분명 나의 문제입니다. 내 다리를 다친 것이고, 고통 역시 내가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다리 때문에 아내가 받을 상처를 염려하면서 아내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합니다. 내가 당한 상처보다 아내가 받을 상처를 더 먼저 생각하는 이 기도가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직후에 대위의 기도는 응답이 되어 절단된 다리가 기적같이 회복되면서 그는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있었지요.

 

지상에서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지상에 계실 때의 삶은 성경에 나와 있으니 우리가 어느 정도 압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신 후에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 궁금합니다. 로마서 8:34은 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중보기도를 한다고 해보세요.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 사역에 자동으로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오스왈드 샌더스 목사님은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려 중보기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직도 받으셔야 할 고난이 있는데, 우리가 중보기도를 하게 되면 그 고난을 함께 지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이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것입니다. 천사들도 할 수 없는 일이 중보기도입니다. 오직 예수님과 그리고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대한 여러분의 의식이 더욱 민감해지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이 여러분의 가슴 안으로 가득 밀려오기를 원하십니까? 그런 분들은 중보기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사역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그런 분들은 중보기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그런 분들은 중보기도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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