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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 가도록(빌립보서 3:12~4:1)
최영모 [beryoza]   2020-09-20 오후 4:15:12 142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교회 안에는 많음을 본다. 왜곡된 신앙 형태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설교를 준비하였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빌립보서 3:12~4:1)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처음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과 교제하실 때 하나님은 여호와(야훼)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십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새번역 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주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과 언약을 맺으신다는 친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모세에게 알려주셔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역사 안에서 계속 이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탄이 뱀을 통하여 하와를 속이고 선악과를 따 먹도록 유혹할 때,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신 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말합니다. 엘로힘은 힘과 능력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강하고 힘이 넘치는 하나님, 엄격한 하나님의 이미지로 바꾸어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주 하나님(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계속 나오다가 사탄이 하와에게 말할 때는 그냥 하나님(엘로힘)으로 말합니다.

사탄은 이렇게 유혹을 합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엘로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3:5). 사탄의 이 말에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모두 나타납니다. 너희가 어떤 것을 하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은 어떤 자격을 갖추면 거룩한 존재가 되며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도 율법주의를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네가 공부를 잘하고, 착한 일을 해야만 부모님은 너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라는 자녀는 성장하여도 부모를 존경하지 않게 됩니다.

사탄이 유혹하는 말에는 율법주의뿐만 아니라 반율법주의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너는 선하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네가 하나님처럼 될까 봐 거짓말을 하신 거야. 너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유혹합니다. 이것이 반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모두 사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왜 만들었을까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지게 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의 길에서 넘어지게 하려고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류에게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DNA가 뼛속 깊이 새겨져 있어요. 종교나 사상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는 계속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등장하였습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처음 나오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권의 책을 모세 5경이라고 하며, 율법서라고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율법을 크게 제사법과 도덕법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제사법은 죄를 지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결과로 죽어야만 하는데, 대신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를 전가합니다. 그리고 그 동물을 제물로 바치면 사람은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용서받으려고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반드시 동물이 죽어야만 하는데 그 동물을 대신하여 죄 없는 예수님이 제물이 되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믿을 때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말하는,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동물을 희생하는 제사는 이제 다시는 드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율법에는 두 가지, 제사법과 도덕법이 있다고 했죠? 제사법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라면 도덕법은 무엇인가요? 율법을 압축하여 놓은 십계명이 대표적인 도덕법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을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런 여러 가지 계명이 다 도덕법에 속합니다.

도덕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사라지지 않아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7~20)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했어요.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하였어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많이 오해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켰던 그 율법을 조목조목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앞서 인용한 성경에서도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하는데, 이 계명이 율법입니다. 만일 율법이라는 말이 거북하게 들리시면 율법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계명으로 바꾸어서 생각하셔도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자고 하면 아무런 거부감이 없잖아요.

 

반율법주의는 무엇일까요? 반율법주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완성하였다는 말을 우리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를 받으니 마음대로 살자고 하면서 방종하게 되는데, 이것을 반율법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생기는 변화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즐거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되고요. 요한일서 5:3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일이 즐거운 거예요. 그것이 무겁고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확인해보세요. 하나님이 좋아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이 즐거워지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해도 됩니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를 복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도록 하셨어요. 그러고 나서 계명을 주시면서 이것을 잘 지키면 너에게 복을 주겠다 하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상구 박사는 성경에서 말하는 음식을 통하여 어떻게 건강하게 살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설명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원래 안식교 교인이었는데, 얼마 전에 그곳을 나와서 기독교로 개종하셨어요. 그분이 간증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 말을 하는 거예요. 안식교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계명(율법)들이 명령인 줄 알았는데, 복음을 알고 보니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었더라.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임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복음을 바르게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또 하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구원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충분히 율법을 지킬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믿는 자들과 함께 영으로 계시는 분, 그분을 우리는 성령님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도덕법, 율법, 계명, 말씀 이런 것을 지킬 힘이 있는 거예요. 나 혼자는 못하지만, 성령님이 도와주시니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를 좀 해볼게요.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어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싶고,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인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마음대로 죄지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지 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 믿는 것이 너무나 좋거든요. 그러면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먼저 이해하고, 오늘의 성경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바울은 12절을 시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그러는 거예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반율법주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말도 보세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보니까 그들은 완전히 잘못된 믿음,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죽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쟁이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다마스쿠스로 갑니다. 다마스쿠스 외곽까지 갔을 때 갑자기 눈부시게 환한 빛이 바울에게 비치는 바람에 바울은 눈을 못 뜨고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때 이런 음성이 들려왔어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헤치려고 하느냐?”(사울은 바울의 원래의 이름입니다) “주님, 누구십니까?”(여기에서 주님은 예수님을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나보다 높은 존재를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바울은 사흘간 눈을 못 뜨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다는 말은 바로 그 사건을 말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쟁이들을 핍박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예수쟁이들을 핍박하는 것을 예수님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동일시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이 참 무서워요. 내가 믿음의 형제를 미워하고 무시할 때 그것은 곧 주님을 미워하고 주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가 누구를 도와주면 그것은 곧 주님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믿는 사람을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또 하나는,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갈 때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일행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빛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바울 혼자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 콕 찍어서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집단으로 부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사무엘도, 다윗도 모두 한 개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부르셔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붙드셨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붙드세요. 그리고 주님께 순종하면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구원의 길을 마지막까지 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나오는 말씀도 보세요,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구원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 어디에서 구원받았으니 마음대로 편하게 살아도 된다고 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구원받았으니 안심하고 내 마음대로 살자고 하는 것은 반율법주의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일지 모르지만, 한번 구원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주의도 그리고 반율법주의도 모두 십자가의 원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을 마치 달리기하는 선수처럼 비유로 말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갑니다. 달리는 선수가 자꾸 뒤를 돌아다보면서 저 지점에서는 더 속도를 내었어야 하는 데, 저 도는 지점에서는 천천히 가도 되는데,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바울 개인에게는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했던 사건에 묶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뒤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분노에 사로잡히는 것도 뒤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울증에 사로잡히는 것은 뒤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와 게으름에 사로잡히는 것도 뒤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화 <부활>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장면을 목격한 백부장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며칠 뒤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돌자 백부장은 누가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자신이 예수의 죽음을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다니면서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자리에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되고, 그분을 만나러 갈릴리까지 갑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이 말을 합니다. I can never be the same.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데, 그 말이 제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어요. 그래서 한동안 제 카톡에다 이 말을 적어놓았습니다. I can never be the same.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바울의 다짐과 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목표점이 하나님이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달려가는 방향의 끝에는 반드시 그리스도가 있기를 원합니다. 21일 특별 기도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는 주님께서 일하시는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주님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맙시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일에 주저하지 맙시다.

어느 아나운서가 자신의 아버지는 막노동꾼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사람들은 아나운서인 그 여성이 번듯한 집안에서 자랐을 것이라고 미리부터 판단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무슨 일 하시냐고 물을 때 건설 쪽 일을 한다고 하면 아버지가 건설회사의 대표나 중책을 맡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답니다. 아버지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아버지는 이미 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이 깔린 사회에서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였고, 막노동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 기사를 읽으면서 저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그 아나운서의 아버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신, 우주의 왕이신 아버지가 있는데 그 아버지를 드러내는 일에 주저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 좋은 아버지를 자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하는 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나도 너희를 모른다고 하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오늘의 말씀 가운데 12~14절을 함께 읽읍시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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