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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빌립보서 3:1~11)
최영모 [beryoza]   2020-09-06 오후 5:52:31 124

요즘 한국교회가 당하는 수치와 모욕 때문에 며칠 전에는 참으로 가슴 아프게 기도하였다한국교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그러다가 바울의 기뻐하라는 말을 듣는다. 이런 상황이라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이 때에도 적용될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빌립보서 3:1~11)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는 별명이 몇 가지 있는데, 감옥에서 쓴 편지라고 하여 옥중서신이라고도 하고, 또 하나는 기쁨을 많이 말한다고 하여 기쁨의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기쁘다’, 혹은 기뻐하라라는 말이 무려 9번이나 나오지요.

3장을 시작할 때도 주안에서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기쁨은 우리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환경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요

2장에서 바울은 두 일꾼 디모데와 에바브라디도를 매우 칭찬하면서 빌립보교회에 그들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3장으로 와서는 기뻐하라는 말을 하자마자 어떤 일꾼들을 향하여 개들이라 그러고, 악한 일꾼이라 그럽니다.

당시 빌립보교회에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교리가 대립하고 있었어요. 하나는 율법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반율법주의였습니다. 둘 다 다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장에서 먼저 율법주의를 말하고, 뒷부분에서는 반율법주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앞부분, 그러니까 율법주의의 잘못에 대한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바울에게서 개들이요 악한 일꾼이라는 욕을 듣는 그들의 행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그다지 흠결이 없는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럼 바울은 왜 그들을 개라고 말하고, 악한 일꾼이라고 말할까요? 구원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 받는 것인데,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에다 무슨 행위를 플러스해야만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 믿는 것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바울은 육신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육신이란 세상적으로 자랑할만한 것들입니다. 가문이 좋다거나, 명문대학을 나오고 공부를 많이 했다거나, 외모가 반반하다거나, 직업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하거나, 건강이 좋다거나,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이런 것을 모두 육신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믿음과 연관시키고, 구원과 연관시킨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곳에 오신 어느 권사님이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자기 딸이 서울대학교 법대에 들어갔습니다. 너무나도 자랑하고 싶은데, 권사라는 것 때문에 자랑하는 것이 자꾸만 걸리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랑을 하지 못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사람들이 당신 딸은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고 물어봤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더랍니다. 그 얘기 끝에 그 권사님은 그러셨어요. “내 안에 그런 육신의 욕망이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그 권사님만 그러겠어요. 우리 모든 사람의 본성입니다.

 

육신이라는 말을 하면서 사도 바울은 그럽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의지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있는 육신으로 자랑할만한 것들, 좋은 가문과 순수한 혈통과 신앙적인 열정 등 7가지를 죽 나열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고 나니 자랑으로 삼던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오물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하는 거예요. 개역 성경에는 배설물이라고 하였는데, 오물이나 배설물은 한자어이고, 순수한 한글로는 똥이라고 합니다. 좋은 가문, 순수한 혈통, 신앙적인 열정도 예수를 만나고 나니 모두 똥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똥이라고 한다면 무시해야 하고 버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느 이단 종파에서는 바울의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요.

오해하지 말아야 해요. 바울의 말은 열거한 그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단지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예수님 그분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값진 분이라는 말을 이렇게 비교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내가 그동안 의지하고 있던 것, 내가 그동안 좋아했던 것, 내가 그동안 남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들이 모두 시시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양이라고 한다면 그것들은 촛불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제가 청소년 시절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소위 말하는 세상 노래가 부르기 싫어졌어요. 저의 세대의 노래는 7080이었는데, 그런 노래들이 모두 시시한 거예요. 찬송가나 복음성가만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세상 노래가 나쁜 것인가요? 아닙니다. 지금은 저도 종종 세상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때는 그분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기에 다른 노래들이 재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청소년 시절에 바둑을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둑에 약간 미치려고 하던 때, 주님을 만났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배시간에 장로님이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려고 두 눈을 감았는데, 제 머리 속에 바둑판이 그려지고 흑과 백의 바둑돌이 막 놓여집니다. 그러면서 어디에다 아다리를 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깜짝 놀라면서 그때부터 바둑을 접었습니다. 바둑이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쁘지 않아요. 단지 나에게 오신 주님이 너무나 크신 분이기에 그분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스스로 멈추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 나쁘거나 죄라는 말이 아닙니다. 노래는 우리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줄 수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나와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형수술을 통해서 자신감을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돈으로 삶의 즐거움을 더 많이 누릴 수도 있습니다. 바둑을 통하여 정신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빠진 나머지 자기가 가야 할 길과 방향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그런 것들에 몰두한 나머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하게 되면 그것은 나쁜 것이 됩니다. 게임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지능발달에 도움이 됩니다. TV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게임이나 TV에 빠져서 숙제도 하지 않고, 당연히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으면 그때는 게임이나 TV는 나쁜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건강, 외모, 학벌, 가문, , 명예, 이런 모든 것들은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이 있다는 것은 죽음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40대가 되면 외모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는데, 아무리 화장하고 포장하고 위장하더라도 거기서 거기라는 것입니다. 외모는 평생 가지도 않고 매우 짧은 시간만 갈 뿐입니다.

50대가 되면 학력의 평준화가 이루어집니다. 어느 대학교 가느냐가 젊었을 때는 매우 중요했어요. 그런데 50대가 되면 명퇴라는 단어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회사에서 명퇴의 우선적인 대상이 누군지 아세요? 명문대학교 나온 사람들이라고 그래요. 회사에서 그런 사람들을 먼저 내보낸다고 합니다. 좋은 대학교 가겠다고 기를 쓰지만 50 넘으면 그게 그겁니다.

60대가 되면 건강의 평준화가 이루어집니다. 조금 더 건강한 것이나 조금 덜 건강한 것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 중 누가 더 오래 살 것 같습니까? 건강이 좀 시원찮은 사람이 더 오래 산답니다. 이유는 건강이 안 좋으니까 늘 조심하면서 사는 데, 건강이 좋은 사람은 방심하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덜컥하고 가버린답니다. 60 넘으면 아무리 건강이 좋아도 절대 큰소리 치지 말아야 합니다.

70대가 되면 재산의 평준화가 이루어집니다. 돈이 많다고 식사를 하루에 여러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외국 여행도 많이 못 다니니 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재벌들의 식단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많이 먹거나 기름진 것을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 주로 먹는 것이 된장찌개나 나물 그런 것들을 조금씩만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외모, 학벌, 건강, 돈 이런 것들이 매우 짧은 시간만 우리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마지막 결론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으로 결론지어지는 것들을 붙들고, 그것을 얻으려고 목숨을 걸더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종착역은 죽음인데,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건강, 외모, 학벌, 가문, , 명예, 권력, 이러한 바깥 풍경만 열심히 즐기고 있었습니다. 열차가 빠르게 달리면서 금방 사라지는 것들인데,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타고 있는 죽음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품에 안고 열차 밖으로 뛰어내리셨어요. 우리를 살리고 당신은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한순간이라도 여러분, 그것을 잊지 맙시다.

 

바울이 그것을 깨달았어요. 이전에 자랑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똥으로 여기고 싶은 이유는 자기를 품에 안고 죽음의 열차에서 뛰어내리신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싶고, 얻고 싶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소원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찼던 것입니다.

 

1.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10).

알고 싶다는 것은 배워서 깨닫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아는 것, 체험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교인들이 어린아이를 안고 교회에 올 때가 있습니다. 귀여워서 제가 안아 주면 아이들이 잘 울어요. 제 아내는 제가 아이를 편하게 안지를 못한다고 하는데, 우는 아이가 엄마에게 가면 뚝 그칩니다. 아이는 엄마의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릅니다. 엄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엄마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엄마를 압니다.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편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적 지식으로는 그분에 대해서 잘 모를 수 있어요.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지고 싶고, 더 알고 싶어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집을 사랑하게 되고, 교회에 가는 것을 기뻐하는 거예요.

다윗을 보세요. 사울에게 쫓겨 다니느라 성전에 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참새와 제비를 부러워합니다. 너희들은 마음 놓고 주님의 집에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니 하면서 부러워해요. 화려한 궁전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 문지기(수위)로 사는 것을 더 좋아할 정도로 성전을 사랑하였습니다.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님을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2.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싶다고 하였습니다(8).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싶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분이 하라는 것을 하고 싶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안에 주님이 들어오시게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여성이 임신하게 되면 태아를 위하여 좋아하던 커피를 줄입니다. 약도 함부로 먹지 않고, 술 담배는 당연히 하지 않고요. 행동도 조심하게 되고, 입맛도 변하며, 몸의 체형까지 변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게 되면 어떤 것은 멈추게 되고, 어떤 행동은 달라집니다. 좋아하던 것이 싫어지고, 싫어하던 것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모습입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줍니다. 그전에는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하고 강제로 빼앗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게 되면서 그렇게 변합니다.

 

3.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하였습니다(9).

구원이란 나의 결심에 달려 있지 않아요. 주님께서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외치고, 평생을 러시아까지 가서 주님 전하면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주님께서 나는 너를 모르겠다고 하면 이것처럼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잘 모를 때는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다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신앙은 나의 판단과 나의 확신과 나의 결심에 달려 있지 않고, 주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것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남을 돕고, 선한 일을 하고, 주일성수, 성경 읽기, 기도, 헌금, 봉사 등 종교적인 행위를 잘 하였기에 나는 의로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바울은 그런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봐주시는 것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그것이 가장 확실하게 보장된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날 때 어떤 결심을 하셨어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날 때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그 이전에는 여러분이 자랑하던 것이 비록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것이 시시하게 보이는 그런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그 경험이 없으면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 여러분을 콘트롤 하게 됩니다. 그것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데도 여러분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러분을 그런 풍조에 길들여서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은혜의 바다, 진리의 바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누리는 행복의 바다에 빠져보지 못한 사람은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믿음이 아니고 신념일 수도 있습니다. 믿으면 구원받는 말에 세뇌당한 것일 수도 있고요. 믿음과 신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스크를 쓰니까 숨 쉬는 것이 불편하지요? 마스크를 오래 쓰고 있으면 하품이 자주 나오는 것을 경험해보셨습니까? 숨을 들이마실 때는 산소가 몸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 몸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숨을 내쉴 때는 몸에 안좋은 이산화탄소를 많이 내보게 되면서 우리는 건강해집니다. 그런데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바깥으로 나가야 할 이산화탄소가 상당히 다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 산소를 마셔야 하는 것처럼 자꾸만 예수를 들이마시게 되면, 예수는 여러분 안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면서 여러분에게 해롭고 무익한 것들을 바깥으로 내보내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은총을 사모하고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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