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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하는 사람들(빌립보서 2:19-30)
최영모 [beryoza]   2020-08-23 오후 4:17:23 133

충성하는 사람들(빌립보서 2:19-30)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에는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크게 늘고 있습니다. 방역하는 분들과 교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나 개인들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그리고 주일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려야 하는 교회 위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도록 잠시 기도합시다.

 

매 주일 제가 칼럼을 썼지요. 그런데 두 주 전에는 제가 칼럼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칼럼에 대하여 여러분이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칼럼을 쓰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왜 칼럼이 없느냐고 한국에 있는 집사님 한 명이 물어왔고, 그 사람을 빼고 나면 물어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면 제 판단이 맞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매주 칼럼을 쓰는 일도 쉽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다지 관심도 없는데, 힘들게 쓸 것 뭐 있나 싶어서 그만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 생각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칼럼을 쓰지 않았던 바로 그 주일에 한 성도님이 직접 만든 카드 하나를 저에게 주는 거예요. 거기에는 바로 얼마 전에 쓴 칼럼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칼럼을 다시 쓰라는 주님의 뜻인가보다 하고는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면서 회개하였습니다.

진정한 충성이란 자신의 욕망을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충성에 대한 어떤 대가를 기대하는 것, 충성함으로 무엇인가 얻으려는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충성이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충성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그런 분들에게는 <토고>라는 영화를 추천합니다. 한 마리의 개를 통하여 충성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적어도 충성이라는 관점 하나에서 본다면 나는 개만도 못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영화입니다.

미국의 한 저널리스트가 쓴 책 가운데 <위험한 충성>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두 가지 충성을 말하는데, 하나는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충성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뭐가 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하는 충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충성의 대상을 잘 알고 신뢰하며 존경하는 충성이 있습니다. 토고라는 영화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진정한 충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예수님에게 필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거나 빵을 주시거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를 많이 채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필요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을 보면 한결같이 예수님에게 충성한 사람들입니다. 맹목적인 충성도 아니고, 두려워서 한 충성도 아니며, 무엇인가를 기대하기에 한 충성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기에 한 충성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예수님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을 통하여 충성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충성스러운 사람 디모데를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디모데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자기 일에만 관심이 있고, 주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데, 디모데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위하여 바울과 함께 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실 때는 대충대충 믿어도 좋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 훼퍼라고 하는 독일의 목사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주님을 온전하게 따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각오를 하고 따라나서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저의 얘기를 하여 좀 죄송하지만, 선교사로 나오기 전에 저는 선교사로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바로 나가지 못하고 자꾸 망설였습니다. 하나님께 다 드리고 싶으면서도 죽으러 가는 자리까지 가는 것은 선뜻 내키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기왕 가는 것 조금이라도 더 젊었었을 때 나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렇게 결심했어요. 러시아에 가서 그냥 죽어버리자 하고요. 제가 왔던 1993년도의 러시아는 정말 혼돈과 궁핍과 무질서의 사회였습니다. 호텔 커피숍에서 앉아있는데, 한 사람이 들어와서 제 옆 테이블에 있던 사람에게 권총을 들이대는 모습도 목격하였고, 사람의 시신이 며칠이나 길거리에 방치된 모습도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먹을 것이 없었어요. 먹을 것을 구하러 종일 돌아다닌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그때 힘들지 않았어요?” “힘들지 않았습니다.” 이게 저의 정직한 대답입니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죽을 각오를 하고 왔는데, 그 정도의 어려움은 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지나온 길을 뒤 돌아봅니다. 그러면 선교사로 온 것이 저에게는 큰 복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을 위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나서니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도와주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제 생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증언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르지만, 떡을 뗄 때까지만 따르고, 수난의 잔을 마시는 데까지 가는 이는 적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사랑하지만, 곤란을 당하지 아니하는 때만 사랑한다.”(<존주성범>, 105) 이 말은 바울이 말한, 자기 일에만 관심이 있지 주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 충성스러운 사람 에바브라디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먼저 디모데를 추천한 바울은 이제 에바브라디도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에바브라디도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있었어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자 빌립보교회는 기도와 함께 바울에게 사랑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사랑은 마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목회자인 에바브라디도를 바울에게 보냅니다.

기도 부탁을 하는 사람은 종종 단순하게 입술로만 하는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바라면서 기도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기도를 부탁드립니다하면 교회당 건축비를 도와주십시오하는 의미가 담겨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기도 부탁을 할 때 참으로 조심스럽게 합니다.

한데 이런 일이 있었어요. 현지인 목회자가 저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교회당 건물과 관련하여 돈이 좀 필요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도와주거나 아니면 돈을 빌려주거나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돈이 없었어요. 그리고 빌려줄 형편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해보자고 하면서 돌려보냈습니다. 목사가 기도해보자고 하면 어떨 때는 도와주기 힘들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눈치 없이 자꾸만 찾아와서 기도해보니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면 목사는 정말 답답합니다.

선교사들은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기관이나 사람들에게 선교보고를 하면서 기도편지를 쓰게 됩니다. 마침 선교 소식을 쓰게 되면서 별 생각하지 않고 바로 직전에 찾아온 현지인 목회자 사정을 말하며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받은 어떤 분이 마음에 감동이 되었나 봐요. 그 현지인 목회자에게 필요한 돈이 얼마냐고 묻고, 그 돈을 보내왔습니다. 저는 기도하지 않았는데, 그 목회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좀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어요. 선교사는 믿음 없이 기도 제목을 말하였지만, 편지를 읽는 사람은 믿음으로 읽은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다른 교회들도 바울을 위하여 기도했겠지요. 바울을 통하여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어요. 그러나 그냥 기도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는 기도와 함께 행동이 뒤를 이었어요. 그래서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하여 에바브라디도를 로마까지 보낸 것입니다.

 

이제 바울의 입장에서 봅시다. 장거리 여행의 위험을 무릅쓰고 에바브라디도가 로마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힘든 여행이어서 그런지 로마에 온 에바브라디도가 병이 났어요. 죽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병은 심하여졌습니다. 자기 때문에 온 사람이 그렇게 되었으니, 바울로서는 얼마나 미안하고 난처한 상황이었겠어요. 그리고 자기들의 목회자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교회는 또 얼마나 걱정을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병이 나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빨리 에바브라디도를 빌립보로 되돌려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봉사한 에바브라디도를 존경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바울이 볼 때 에바브라디도는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님께 충성한 사람입니다.

 

3. 충성하는 빌립보교회를 봅시다.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은 바울을 매우 사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가서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자신들이 갈 수 없으니 대신 에바브라디도를 보내는 것입니다. 누구를 도와주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 대신 다른 사람이라도 내세우는 것, 이것을 바로 기도라고 말하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라고 제가 이름은 밝히지 않습니다만, 어떤 사람은 어려운 교인을 도우려고 저에게 와서 그들에 대한 구제금이나 장학금을 전해달라고 합니다. 자기가 직접 못하는 대신 저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러시아어 공동체에서도 코로나 사태로 어려워지자 저에게 돈을 갖고 와서 현지인 목회자에게 전해달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현지인 목회자가 그동안 태권도를 가르쳤는데, 코로나 때문에 수입이 없어졌어요. 교회에서 드리는 사례비는 한 달 생활비에 턱없이 부족한 액수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어렵지만, 그러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오병이어 선교회도 그렇습니다.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면서 하나를 더 사서 교회에 가져옵니다. 그러면 담당자가 그 물건을 교회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달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게 힘드니까 아예 돈으로 갖고 와서 필요한 것을 사서 그들에게 주라고 담당자에게 전하기도 합니다. 내가 직접 못하고, 내가 직접 못갑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그 일을 하려는 것이지요. 빌립보교회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내가 행동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기도 요청을 받을 때는 기도하면서 하나님, 내가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하고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빌립보교회는 온전하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4. 충성스러운 사람 바울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한참 어린 사람 에바브라디도를 형제라고 부르고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형제라는 말을 들으면 생각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지방교회 혹은 회복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있습니다. 워치만 니의 성경해석을 따르고 있어 이단이다 아니다 하고 논쟁이 많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모든 사람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목사나 장로, 집사나 권사 이런 제도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형제인 것이지요.

꽤 오래전에 이 지역에 지방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의 어린아이가 저의 아들과 같은 학교였고, 사는 집도 저와 가까운 거리였기에 제가 아침에 몇 번 아이를 학교에 태워다주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그 아이를 태우고 학교에 가는데,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저에게 형제님은 아침 식사를 하셨어요?” 하고 묻습니다. 그 조그만 아이가 저보고 형제라고 하니 제가 상당히 당황스러웠어요. 분명 개념적으로는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참 어색하게 느껴진 경험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저보고 부른 형제라는 말이 어색하였듯이 노사도가 한참이나 어린 사람에게 형제라고 하는 말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바브라디도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동역자요 전우라고까지 부릅니다. 믿음의 길을 함께 간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김우영 목사님, 소피아 선교사님 함께 만든 카톡의 단톡방 제목을 함께 걷는 사람들이라고 붙였습니다. 러시아에 와서 고생도 기쁨도 함께 나누면서 믿음의 길을 간다는 의미입니다.

바울 당시 사회에서 사도라는 직분은 별로 존경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비슷할 것입니다. 40~50년 전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목사의 직분은 사람들이 볼 때 그렇고 그랬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호하는 남편감의 직업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목사가 어느 정도냐 하면 이발사 다음일 정도로 순위가 낮았다고 그래요. 그 정도로 인기가 없었어요.

40~50년 전의 목사의 인기가 그랬던 것처럼 초대 교회 당시 일반 사람들은 사도를 별 볼일 없이 생각하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할 때 제일 먼저 끌려가고, 가장 큰 죄를 뒤집어쓰는 사람도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냉소적인 의미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붙인 것입니다. 처음 사용될 때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예수쟁이’, 혹은 예수 패거리라는 뉘앙스와 비슷해요.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예수쟁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라는 직분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겼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 믿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친구 목사님이 내가 매일 기쁘게라는 프로그램 영상을 저에게 보내왔어요. 4명의 형제가 모두 목사가 된 가정에 관한 얘기였는데, 그중의 한 명이 저와 신학교 동기이기에 보내준 것입니다. 그 어머니에게 매우 인상적인 얘기가 있었어요. 6.25 당시 북한에서 피난을 나오는데,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어머니가 꼭 붙들고 온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을 것 같아요?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서 하나만 갖고 피난을 나와야 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오시겠어요? 그 어머니가 하나 갖고 온 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교인증명서였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죽음의 고비를 넘으면서 고작 교인증 하나만 갖고 왔다면 너무 어리석지 않습니까? 미련해도 그렇게 미련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 어머니에게는 내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었고, 그 증거가 바로 교인증명서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요, 제가 살아오면서 보니까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을 하나님은 무척이나 사랑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신비 가운데 신비입니다. 자기의 지혜대로 사는 사람보다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복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 당대에 잘되지 않으면 그 자식 대에라도 반드시 잘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사람을 가볍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서 2위나 3위에 놓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사람을 대단치 않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사람을 최고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을 하나님도 존중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디모데로 에바브라디도로 바울로 빌립보교회로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면 우리는 디모데도 되고 에바브라디도도 되며 바울도 되고 빌립보교회도 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상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상을 받을 기회가 여러분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상을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에게 신실한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그 사람에게 신실하십니다. 성경에서 수없이 약속하였고, 믿음의 선배들이 수없이 경험한 일들입니다. 그리고 저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미련하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는 것, 그것이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되고, 여러분의 꿈이 되고, 여러분의 열정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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