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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요한복음 15:9-12)
김우영 [ready4god]   2020-03-15 오후 9:47:07 1368

2020315(사순절 3 번째 주일)

슬픔이 기쁨에게

요한복음 15:9-12

:11b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여는 말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해 /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 -

 중학교 3때 국어를 가르치셨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이 시를 처음 소개받았습니다. 이후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던 친구를 통해 다시 들었고, 이후 기억에 날 때 뒤적이곤 하던 시로 제가 사역자가 된 여러 동기 중 하나입니다. 러시아에 올 때 두고 온 책들 사이에 있던 그 시집이 생각이 날 정도로 가슴에 깊이 남던 시입니다. 추운 겨울 귤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할머니에 대한 가녀린 연민과 동정보다는 조금이라도 귤을 싸게 사보겠다고 흥정하는 이기적인 ’, 그리고 이런 내가 누렸던 기쁨은 과연 진정한 기쁨이었을까 고민했던 그때가 다시 떠오릅니다.

 요즘 뉴스를 접할 때든지 SNS를 통해 듣는 소식들은 모두 우리를 슬프게 하고 두렵게 하는 말들로 넘쳐납니다. 매장에 바이러스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소식은 대형 백화점을 닫게 하고, 작은 가게에서는 주홍글씨처럼 주인의 마음을 퍼렇게 질리게 하여 소망을 다 잃은 채 털썩 주저앉게 만든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보이지 않는 공포의 실체를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과 사회적 책임 때문에 우리 교회도 두 주간 가정예배로 대체하다가 오늘 다시 모였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고, 가급적 만남도 멀리하고, 되도록 피해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중에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이 시기만 지나가면 행복할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퇴치되면 나에게 다시 기쁨이 찾아올까? 신천지의 실체가 다 드러나고 한국에서 뿌리가 뽑히면 정말 기쁘고 행복할까? K-94마스크를 집에 천 박스 정도 쟁여 놓으면 불안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해결 되어야만 기쁘고 행복할까? 몇 주 드리지 못했던 예배를 드리면 상상할 수 없는 큰 기쁨이 찾아올까? 불편과 두려움은 곧 사라지고 해결되겠지만, 이 시기가 지나가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겐 또 다른 고난과 어려운 환경이 분명 올 것입니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본문을 정하고 묵상하며 기쁨이 넘치는 것은 과연 무엇일지, 이런 시기에도 기쁨을 넘치게 하고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일지 더욱 고민하게 됐습니다. 이제 함께 이 질문의 답을 찾아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푸는 말

1. 기쁨은 쾌락이 아니다.

현재 세계에는 소위 3해피 메이커(happy-maker)’라고 불리는 치료제가 있습니다. 탈모증 치료제인 프로페시아’,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 그리고 항우울증 치료제인 프로작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의 행복과 기쁨을 증진시키기 위해 만든 약으로, 우리 삶에서 슬픔과 불행을 느끼는 요소들을 감소시키면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만든 약들입니다.

그런데 이 약들의 개발이 인류의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K-94마스크가 우리의 영원한 안전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잠시 만족을 주거나, 일시적으로 증상이 개선되기는 하겠지만, 이 약이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 코로나19의 완벽한 백신을 발견했다 할지라도 그 백신을 기쁨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안전하고 행복해지려는 욕구, 기뻐하고 만족하려는 소망을 잠시 채워줄 수 있을지언정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기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11절에 나오는 기쁨은 카라(Χαρα)의 기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입니다. 조건, 상황과는 무관한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8: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헤도네)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하나는 헤도네(ηδονη)의 기쁨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잘 자라고 싶었지만, 이 땅의 기쁨에 사로잡혀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합니다. 즉 카라의 기쁨을 목표로 삼지 않고 이 땅의 기쁨을 목표로 하게 되면 잠시 만족한다 하더라도 열매 없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3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헤도네)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땅의 만족과 기쁨과 안전만을 기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헤도네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되어 결국 온전한 열매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기쁨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으로 사람들은 그 기쁨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카라와 헤도네를 구별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신천지와 바이러스를 옮기는 이들이 혐오스러워 저주하고, 사라지면 행복하리라 말한다면 우리들은 아직 카라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스크를 쌓아두고, 보다 안전을 위해 몸을 움츠리고만 있다면 이 또한 카라의 기쁨에는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나만 아니면 돼의 기쁨이 아니라 마르지 않고 궁극적인 기쁨입니다. 주석을 보니 카라(Χαρα)는 기쁜 상태뿐만 아니라, 기쁨의 대상도 함께 가리킵니다. 즉 너희의 기쁨을 넘치게 하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예수로 가득 채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어려운 중에도 예수를 붙들고 있다면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고 기쁠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뉴스를 통해 신천지의 폐해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며 분한 마음도 생기고 저주하고 싶지만, 신천지가 사라진다 해도 신심이 강한 우리나라엔 여러 명의 재림주가 여전히 건재합니다. 코로나19가 종식된다하더라도 아직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는 계속 나올 것입니다.

헤도네의 기쁨은 악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이 적대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카라의 기쁨을 잊고 상황을 통한 기쁨만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카라의 기쁨, 우리 때문에 죽임 당하신 예수님으로 기쁨이 온전해지길 축복합니다.

 

2. 기쁨은 공감이다.

최윤규님의 물속의 물고기도 목이 마르다에 보면 논산 훈련소 주변이 유독 깨끗한 이유가 나오는데 그것은 이 팻말 때문이랍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귀하의 자식들이 청소해야 합니다.

힘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한번 왔다 가는 곳, 자주 들르지도 않을 곳, 대충하고 가도 그러려니 할 만한 곳일 수도 있지만, 공감이 되고 그 일이 나의 일, 우리 가족의 일이 될 때 우리는 움직이게 되고 마음도 물질도 쓰게 됩니다. 불과 얼마 전 미국독감으로 몇 만 명이 죽었다는 뉴스는 기사로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코로나 사태는 가족의 일이 되고, 교회의 일, 그리고 바로 나의 일로 다가오니 마음 조리며 전전긍긍하지 않습니까?.

최근 대구의 한 아파트에 신천지 성도들이 살아 격리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문성병원의 주차관리원이 신천지 교인이어서 그 병원과 교회 전체가 폐쇄 된 소식도 들었습니다. 제가 파송받기 전 사역했던 곳이 대구였는데 제가 늘 다니던 동네였고 또 친절했던 그 문성병원의 주차관리원 아저씨의 얼굴과 병실이 선하게 들어오며 사건은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다가왔습니다.

혼자 먹는 진수성찬은 맛은 좋을지라도 기쁘진 않을 겁니다. 혼자 보는 코미디는 왠지 씁쓸합니다. 초상집은 밤을 새주는 문상객을 통해 슬픔이 누그러지고 마음의 상처가 회복됩니다. 이런 것을 보면 기쁨이나 슬픔은 공감을 통해 배가되고 반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진 : 평화를 상상하다 라는 책에 보면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고 세상의 중심이라는 글이 나옵니다. 몸의 어떤 부위라도 조그만 가시가 찔린다면 모든 신경이 그곳에 몰리게 되어 그 순간 그곳이 바로 몸의 중심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 역시 같다고 생각됩니다. 가장 부패하고 가장 사악하고 가장 이기적인 곳. 그런데 그곳이 아프고 병들 때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은 그곳을 향했습니다. 세상의 가장 아픈 곳이 세상의 가장 중심입니다.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는 오셨고 또 죽으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가장 아프고 괴로울 때, 우리는 세상의 변방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님께는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었고 또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상황에 공감하시며 결국 자신을 내어 주시면서 그곳을 고쳐주신 사랑.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황과 처지를 공감하지 않으셨다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요?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공감하셨고 함께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전체은 우리와 공감하시고 함께 하고 싶으신 아버지의 마음으로 빼곡히 번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대하고 있습니까?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며 기뻐하진 않았습니까? 공감되지 않는 기쁨은 작은 만족은 될 수 있을지언정 온전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5: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 양(의인)은 오른편에 염소(악인)은 왼편에 둔다고 하시며 의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고 아플 때,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언제 자신들이 그렇게 했냐고 물을 때 하셨던 말씀이 위의 말씀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서늘한 슬픔은 회개하지 않는 기쁨에게, 나누지 않는 기쁨에게, 이기적인 기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이 슬픔은 카라의 기쁨으로 인도하는 긍휼이며 공감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또한 민족과 인류의 아픔과 두려움을 보며 함께 공감해주고 우리의 책임을 살필 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3. 기쁨은 나눔이다.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며 이삭을 따 먹던 제자들을 향해 일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다고 대노하던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마태복음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10-12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우리의 체면과 유익, 만족과 안전보다 귀한 것은 형제에 대한 배려요 나눔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야 말로 참된 복음이며 우리가 목숨 받쳐 지켜야하는 진리입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요즘은 기쁨을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 로 바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뼈저리게 공감하는 분도 계실겁니다. 설혹 우리가 이런 웃픈 현실 가운데 살고 있다 할지라도 진리를 버린 채 살아갈 순 없습니다.

비록 못나고 힘없고 내게 부담만 주는 상황이 슬픔처럼 보이나 그 슬픔을 뚫고 나올 때 우린 참된 기쁨을 만나게 될 줄 믿습니다. 비록 옆에서 허덕이며 뛰는 짐 같은 동반자밖에 없다 할지라도 함께 뛰는 것만으로 우리 믿음의 경주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나중에 그가 나를 일으켜 세울 동역자가 될지 누가 어찌 알겠습니까? 기쁨은 나눔입니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은 구약의 많은 조문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며 나누고 살필 때 주님의 기쁨이 커집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도 더불어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사도행전 20:35b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기쁨은 나눔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러한 기쁨의 배가가 이뤄지길 축복합니다.


닫는 말

딸과 함께 교회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찍 미망인이 되어 시장에서 떡 장사를 하면서 힘들게 딸을 공부시켰고 딸은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딸은 어느 날 엄마의 소원대로 교회에 오게 되지만 예배는 참석치 않고 어색한 듯 친교실에 있었습니다. 친교실에 있다 보니 딸은 교인들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서로 남 헐뜯는 이야기, 돈 이야기, 회의실 쪽에서는 고성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예배 마치고 나온 엄마를 보자 딸은 자신이 들은 것을 말하며 성을 냈습니다. “엄마. 교회가 엉망이야! 저질 집단이야!” 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엄마가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교회 다니면서 주님만 봤는데, 너는 하루 교회 와서는 다른 것만 보았구나!”

친하고 긴밀한 사이일수록 많은 것을 속속들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쓰리고 아린 말로 서로를 아프게 할 때도 참 많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빼쩨르의 이런 좁은 한인사회 속 한인예배 공동체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 순간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의 이런 민낯을 모르시겠습니까? 슬픔이 차오르고 때론 분노도 차오르시겠지만, 그 슬픔을 뚫고 우리의 회개하지 않는 기쁨, 나누지 않는 기쁨, 이기적인 기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기쁨은 쾌락이 아닙니다. / 기쁨은 공감입니다. / 기쁨은 나눔입니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있습니다. 이 때 우리의 기쁨이 이 상황에 달려있지 않고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며 또한 우리가 흙임을, 먼지임을 기억하는 귀한 절기가 되길 축복합니다.

 

슬픔이 기쁨에게 (1979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IP : 188.187.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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