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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 우리가 선택한 가면(요한 일서 1:7~10)
최영모 [beryoza]   2020-01-12 오후 11:11:17 219

위선, 우리가 선택한 가면(요한 일서 1:7~10)

 

2020년은 특별한 해인 것 같습니다. 컴퓨터가 2000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에 큰 재앙이 닥칠 수도 있다고 하면서 두려움과 염려로 맞이했던 2000년에서 10년이 두 번이나 지난 후에 오는 해이기도 하고, 숫자로도 2020 하면서 20이 반복되는 운율도 재미있는 해입니다. 2020년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총이 우리 가운데 넘치길 바랍니다.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어떤 분이 몇 달 후에 다니던 교회를 그만두었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목사님이 운전하는 차를 교인 몇 사람이 타고 가는데, 거칠게 운전하는 다른 차를 목사님이 욕하더랍니다. ‘거룩하신 목사님이 욕을 하다니하면서 그분은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교회를 더 나가지 않게 되었어요.

가톨릭교회 교황이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서 손을 세게 잡아당기고 놓지 않은 여자의 손등을 두 번 내리치면서 화를 냈어요. 온화한 미소가 상징이던 교황의 화난 얼굴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욕하는 목사나 화내는 교황이 신앙의 대상이자 모범으로 따르고 있는 분이 예수님인데, 예수님도 사실 심하게 욕을 하셨고, 크게 분노하신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다는 사실은 저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왜 그런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죠?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위선자회칠한 무덤이니 하고 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처럼 사람이 죽으면 땅에다 묻는 것이 아니고, 굴을 파서 그 안에 시체를 둡니다. 회칠한 무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데,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죽은 사람의 뼈들과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파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적인 행위를 그럴듯하게 하지만, 마음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거예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아예 이렇게 욕을 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이 욕은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큰 욕입니다. 독사나 뱀은 유대인들에게 사탄을 의미한 단어이거든요. 그러니까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말은 사탄의 새끼들아하는 말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심한 욕입니까.

욕만 하신 것이 아니고 저주도 퍼부으셨어요.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무려 여섯 번이나 이런 말로 시작하면서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예수님도 욕을 하시고 저주를 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대체 왜 욕을 하셨을까 하는 것이고, 그들은 무슨 죄 때문에 그토록 심한 저주와 책망을 들어야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7가지 죄를 큰 죄(7 대죄)라고 불렀습니다. 교만 또는 거만 탐욕 정욕 질투 과식과 과음 노여움 게으름 등이었습니다. 이 일곱 가지를 큰 죄로 정한 이유는 그 자체도 죄이지만, 이 죄들은 또 다른 죄를 짓도록 만들기 때문에 죄 중에서도 크다고 한 거예요.

<세븐>이라는 영화는 일곱 가지 큰 죄를 주제로 하고 있어요. 영화의 시작은 몸집이 매우 비대한 한 사나이가 스파게티에 얼굴을 파묻고 죽은 채로 발견되는 장면입니다. 시체가 발견된 방의 벽에는 탐식이라고 쓰여있었어요. 다음 날에는 변호사의 시체가 발견되고, 방바닥에는 탐욕이라고 쓰여있었습니다. 이렇게 연쇄살인이 일어나면서 7 대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갑니다. <세븐>만이 아니라, <양들의 침묵>이나 <레져렉션> 등의 영화도 내용 가운데 7 대죄를 내용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7 대죄는 그만큼 큰 죄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에게 돌발 질문이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어떤 죄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드시 자기가 지은 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 죄가 가장 크다고 생각해하는 것이 있을 거예요. 30초 정도 시간을 드릴 테니 가장 큰 죄가 어떤 죄인가 생각해 보세요. 30초 후에는 제가 몇 분에게 질문을 드릴 것입니다.

 

김은주 권사님은 어떤 죄가 가장 크다고 보시는가요? 잘 모르겠어요. 조용성 형제는요? 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두 분은 생일이 1월입니다. 모두 기억해 주세요. 김소피아 선교사님은? 탐욕이라고 생각합니다. 곽병준 집사님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요. 손신정 권사님은? 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박다훈 집사님은?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이요. 윤찬송 성도님은? 나태라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은 생일이 모두 2월입니다.

 

위선을 가장 큰 죄라고 하신 분이 없었군요. 사실 나는 위선적이야. 그래서 엄청나게 큰 죄를 지었어. 위선 때문에 나는 구원은커녕 지옥에 갈 거 같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그만큼 우리는 위선을 무거운 죄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죄의 리스트에 올라간 첫 번째는 놀랍게도 위선이었습니다(개역 성경에는 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외식은 집에서 밥을 해 먹지 않고 밖에서 음식을 사 먹는다는 말이 아니라, 겉만 보기 좋게 꾸민다는 말입니다. 위선이라는 말과 같아요).

마태복음 23장을 진지하게 읽어보면 위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죄로 여기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위선자들을 지옥의 자식이라고까지 하셨어요. 물론 다른 죄는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죄에 대해서는 때로 자비를 베풀기도 하셨고, 때로 정상참작도 하셨어요. 그러나 위선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하셨습니다. 정상참작이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책망하시고 욕하신 거예요.

 

위선이 그렇게 큰 죄일까요? 왜 유독 위선에 대해서는 그토록 심하게 책망하시고, 저주까지 하신 것일까요?

위선으로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아요. 회개하지 않기에 그들은 지옥에 간다고 하신 거예요. 지옥은 죄를 지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가는 곳입니다.

위선으로 자기 자신을 포장하게 되면 죄나 잘못에 대하여 정직하지 않고, 변명과 핑계로 일관합니다. 바로 그런 변명과 핑계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사람이 있고, 반대로 변명과 핑계를 하지 않아서 낙원에 들어간 사람도 있어요.

낙원에서 쫓겨난 사람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서 쫓겨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에 대한 변명과 정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추궁하십니다. 그라지 아담은 핑계를 대면서 그랬거든요.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아담의 말이 놀랍지 않나요? 자신이 잘못해놓고는 하나님과 자기 아내에게로 책임 전가를 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것보다 죄를 전가하면서 핑계를 대는 이 부분에서 저는 더 많은 아쉬움을 느껴요. 만일 아담이 자기 잘못을 흔쾌히 인정하면서, ‘하나님,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했더라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상상해봅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은 아담이 잘못했다고 하면 다음부터는 조심해하면서 용서하셨을 것 같아요. 징계가 있더라도 적어도 낙원에서 추방당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성경에는 그런 근거의 말씀이 많은 데 그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핑계와 변명만 하였습니다.

아담에게서 보는 또 하나는, 위기 앞에서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떠넘기는 남편을 보면서 하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남자가 없었으니 이혼을 할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는 에구, 내 팔자야. 저런 것도 남편이라고하면서 살았을 거예요. 만일 아담이 하나님, 아내의 잘못은 모두 저 때문입니다. 제 아내에게 책임을 묻지 마세요.’했더라면 하와는 아담을 평생 존경하면서 살았을 거예요.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대다가 아담은 낙원에서 쫓겨났지만, 반대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선 낙원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한쪽에 달린 강도였습니다.

십자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나 군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한 명도 역시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말이 아니라, 조롱하는 말입니다. “, 네가 그리스도라고? 그럼 우리를 구원해봐.” 이런 말입니다.

그때 다른 편에 달린 강도가 빈정거리며 말하는 그 강도를 꾸짖습니다. “똑같은 처형을 당하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그러는 거예요. “주님께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여 그 강도는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강도가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바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판가름 나는 것은 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정직하냐 그렇지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천국에 못가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지 않을 때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이란 참 쉽습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정직하게 인정하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참 어렵습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정직하게 인정하기가 참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당신의 관심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10입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정신과 의사였던 존 스콧트 팩은 주님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결혼 잔치와 포도주를 즐기고 아름다운 향유와 멋진 우정을 누렸으면서도 스스로가 죽임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이 이상한 남자는 인생의 길이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얼마나 오래 사느냐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죠), 오직 인생의 생명력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수님은 생명을 잃어버린 부동의 인간들(변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관심이 없었는데,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거짓의 사람들>, 55)

생명을 잃어버린 부동의 인간들이나 죽은 자를 장사하는 죽은 자들이 바로 위선으로 꾸며진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을 읽어버렸으면서도 변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 답은 이어서 나오는 말씀에 있습니다. 빛 가운데 산다는 말은 밝게 보이도록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죄를 회개한다는 말이고, 사람들이 볼 때는 정직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죄 앞에서 위선의 가면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교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저에게 묻습니다. “선교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 말 할 것 없이 한마디로 해달라는 것이죠. 그때 저는 딱 이렇게 말합니다. “정직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잘 봐주시고, 사람들도 잘 봐줍니다.”

예수님 옆에 오는 것을 편하게 느낀 사람들 가운데는 세리와 창녀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가장 큰 죄인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도 그들이 정죄를 당하지 않는 이유는 나는 세리입니다, 나는 창녀입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겐 죄가 있습니다. 그 죄를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무엇인가를 꾸미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셨고, 가장 심한 욕과 저주를 하셨던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운 2020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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