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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별이 되어(마태복음 2:1-12)
최영모 [beryoza]   2019-12-15 오후 9:08:57 354
우리 모두 별이 되어(마태복음 2:1-12)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바랍니다.

어느 성탄절 밤에 술에 가득 취한 한 사람이 교회 옆을 지나가다가 떠드는 소리가 나서 들여다보았어요. 그리고는 안에서 성탄절 축하행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러더랍니다. “, 교회에서도 성탄절을 지키네.” 요즘 성탄절은 예수 믿는 사람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즐거워합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마음껏 놀 수 있다는 이유겠지요.

한국교회를 비롯한 서방교회는 성탄절을 1225일에 지킵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방교회는 16일에 지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태어나신 정확한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에도 그 날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225일이 맞느냐 16일이 맞느냐 하는 논쟁보다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러시아에서 사는 우리는 1225일에도 축하하고 16일에도 축하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성탄의 의미를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 가장 크고 놀라운 사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사건과 그분이 부활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탄생을 기점으로 역사는 우리가 사용하는 연대를 BCAD로 구분합니다. BC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이라는 의미이고, AD는 라틴어로 Anno Domini, ‘주님의 시대에라는 의미입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선정을 베풀면서 백성들에게 큰 기대와 희망을 안겨주었어요. 자신의 돈으로 식량을 사서 극빈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수도를 개량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편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통치자가 이렇게 하니 백성들은 새로운 시대가 오는 기쁨을 맛보았지요. 교회에서는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복음’(그리스어로 유앙겔리온 εαγγέλιον)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 말도 원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자신의 통치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가 온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단어였어요.

그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다스리던 시대에 식민지 유대 나라의 아주 작은 시골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당대의 권력자들이나 역사가들은 이 아기가 장차 인류의 역사를 BCAD로 나누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자신의 시대를 평화와 행복이 도래하는 새로운 시대로 규정하기 위하여 복음,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을 가져왔지만, 그것은 진정한 유앙겔리온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유대 땅에서 태어난 그 아기를 통하여 참된 유앙겔리온이 온 인류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렇게 천상의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지상으로 들어온 사건이며, 영원한 존재가 제한된 역사 안으로 들어온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서에는 그분이 탄생하실 때의 몇 가지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중의 하나입니다. 헤롯 왕이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한 아기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왔어요. 그들은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러나 유대 나라에 한 왕이 태어나고, 그 왕으로 인하여 모든 나라가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전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별을 관찰하던 중 왕의 탄생이라고 짐작할만한 특별한 별이 나타난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들은 왕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멀고 먼 여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동방박사를 박사라고 하지만 공부를 많이 하여 학위를 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별을 보면서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방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동방박사라고 하는데, 동방이라는 곳은 유대 나라에서 보면 페르시아(지금의 이란)나 혹은 인도를 말하는데, 그들은 페르시아에서 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지금도 동방박사들의 고향인 이란의 우루미에에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자기 조국으로 돌아온 후에 세웠다고 하는 동방박사 기념 교회가 있습니다.(사진)

흔히 동방박사를 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사용하던 찬송가에도 동방박사 세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가 있었어요. 통일 찬송가로 바꾸면서 세 사람이라는 말은 뺐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를 세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들이 아기 예수에게 드린 예물이 황금, 유향, 몰약 이렇게 세 가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세 사람이 먼 길을 여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였고,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동방박사 일행은 최소한 70명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신 왕을 만나기 위해 별의 안내를 받으며 먼 길을 온 동방박사들은 마침내 유대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왕이 태어나신 나라에 도착하였구나 하면서 그들은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갔어요. 왕이 태어났으니 당연히 왕궁으로 가야 만날 수 있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왕궁으로 간 그들은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왕궁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어떤 아이도 태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니 동방박사들의 말을 들은 왕을 비롯한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은 멘붕이 되었습니다. 왕이 태어났다는데 최근에 왕궁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어요. 그럼 다른 곳에서 왕이 태어났다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누리는 현재의 질서가 뒤집힐 수 있다는 의미잖아요. 멘붕 상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은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헤롯왕도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당황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놀란 왕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서둘러 소집하였습니다. 당연하지요. 대를 이어 왕의 자리를 누려야 하는데, 전혀 다른 왕이 등장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도대체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날지 물어보았어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들은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메시아가 태어날 곳은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허위의식에 가득 찬 종교인과 지식인의 전형을 여기에서도 봅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왕의 호의를 입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만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설교만 할 뿐 그리스도인이 이 시대와 역사 앞에서 무슨 내용으로 기도할 것인가는 말하지 않는 설교자들 역시 허위의식에 차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된다고만 말할 뿐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말하지 않는 설교자들 역시 허위의식에 차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지식으로는 훌륭하게 설명해내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무관심하다면 그것 역시 허위의식일 뿐입니다.

메시아(그리스도)가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라는 말을 들은 동방박사들은 , 그렇군요. 우리는 왕이니까 왕궁에서 태어날 줄 알고 예루살렘으로 왔더니 아니었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는 왕 앞에서 물러났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자 동방에서 본 그 별이 다시 박사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십니까? 때로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원하십니까? 자신의 상식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왕궁에서 떠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포기하여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라고 하면서 고집을 부립니다. 사람이 무식한 것까지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무식한 사람이 소신껏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정말 답답합니다. 고집 센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했다는 사람을 저는 거의 보지 못하였습니다. 꽉 막혀 대화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결국은 고집이 세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동방박사들이 저에게 격렬하게 항의할 것 같습니다. 잠시 착각하여 예루살렘 왕궁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을 갖고 무식하니 고집이 세니 하면서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는 것 아니냐고 따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그들이 잠시 착각한 것 때문에 얼마나 큰 비극이 일어났는지 말입니다.

유대 땅으로 들어온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곧장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기 때문에 헤롯 왕이 메시아의 탄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아기는 왕이니까 당연히 왕궁으로 가야지 하면서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갔던 거예요. 그래서 메시아의 탄생을 알게 된 헤롯왕은 박사들에게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달라고 하였어요. 자기도 가서 아기에게 경배하겠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모두가 거짓말이었습니다. 후환이 두려운 것은 아예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무서운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헤롯에게로 가면 안 된다는 꿈을 꾸고는 바로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동방박사들을 손꼽아 기다리던 왕은 그들이 바로 국경을 넘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자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단히 화가 난 그는 박사들이 말했던 것을 기준으로 삼아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을 모조리 다 죽였습니다. 아름다운 성탄절 뒤에는 많은 아이가 무참하게 학살된 어두운 비극이 있어요. 그들은 잠시 착각한 것뿐이지만, 결과는 참혹하였습니다.

바라보아야 할 별을 바라보지 못할 때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평생 60번의 큰 전쟁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두 번의 가장 중요한 전쟁에서 실패하였어요. 하나는 모스크바 전쟁이고 또 하나는 워털루 전쟁이었습니다. 어느 글에서 보니까 두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모두 새벽 별을 보지 못한 채 늦게 일어나 작전에서 크게 실패하였다고 그래요.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한 별이 하늘에서 반짝거리면서 동방박사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이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그 먼 곳에서 아기 예수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별의 안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세 부류를 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가리켜 계시록에서는 빛나는 샛별’(22:16)이라 하고, 민수기에서는 야곱에게서 나오는 별’(24:17)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천사들을 가리켜서도 계시록에서는 별이라고 불렀습니다(1:16, 20, 2:1). 세 번째 부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할 때 별처럼 영원히 빛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을 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12:3).

사람들은 유명한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를 가리켜 대개 스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스타라고 부릅니다. 다른 사람이 스타가 아니라 바로 예수를 믿는 우리가 스타예요. 어제도 우리 선교사들끼리 얘기를 나누는데, 옆에서 들으니 텔레비전에 나오는 스타들이 잘생겼니 못생겼니 하는 얘기들을 나누더라고요. 아이러니한 사실은 스타가 아닌 사람들을 우리는 스타라고 부르면서, 정작 스타인 우리 자신은 스타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가끔은 자신을 스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제대로 아는구나 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그런 스타가 아니라 스타, 스스로 타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스타라고 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스타, 별이라고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볼 때 인간은 의식 깊은 곳에 있는 그 무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은 별을 보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이렇게 시인은 별을 보면서 노래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별을 보면서 그 별자리에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맡깁니다. 별을 보며 점을 치는, 소위 말하는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별을 보니 나이 40이면 내 인생에서 대박이 터질 것 같다고 믿기도 합니다. 어제 토요일 아침 기도회 후에 식사하면서, 이붕 집사님은 점쟁이가 자기에게 나이 40에 대박이 터질 거라고 얘기를 했다면서 살짝 기대하던 표정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50 이전에 번 돈은 자기 돈이 아니니까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미래를 알고 싶은 사람들은 별과 자신의 운명을 연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별을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보고 그 별을 보면서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거예요.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하면서 노래하는 것은 좋지만, 별에다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는 마세요. 별의 사명은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고,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은 창조주를 보지 않고 창조주를 가리키는 별만 바라보고 있어요. 마치 제가 이렇게 손가락으로 저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하는데, 십자가는 바라보지 않고 제 손가락만 쳐다보는 사람하고 같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를 발견하고 아기에게 경배하자 그때까지 인도하던 별은 사라졌어요. 자기의 역할이 다 끝난 거예요. 이처럼 예수님만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입니다. 육신으로는 예수님의 친척 되는 형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며,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당시에 다른 사람의 신발 끈을 묶고 푸는 일은 노예가 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분의 노예보다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노예제도가 없어서 우리는 이 말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남의 집에서 일정한 돈을 받으며 일하는 하인 정도로 생각하지만, 당시의 노예는 하인 수준이 아니었어요. 집에서 기르는 당나귀와 같았어요. 노예와 당나귀와 차이라면 노예는 단지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이런 자리까지 요한은 낮아지고 겸손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성탄절의 메시지는 이렇게 주어집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께 칭찬이라는 말로 할 수 있어요. 그럼 어느 때에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갑니까? 나의 자아가 죽어야만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갑니다. 나를 내세우고 싶은 욕망을 절제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내가 칭찬 듣고 싶어 하고 나를 자랑하고 싶어 하면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입으로만 하나님께 영광이지 실제로는 나에게 영광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스타로 부르셨습니다. 사람은 우리를 스타라고 말하지 않아도 성경은 우리를 스타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흔히 연극의 무대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 올려진 연기자들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세상의 스타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스타가 되어 하나님의 스타답게 살아갑시다.

별은 언제 아름답게 드러납니까? 환한 대낮이 아니라 캄캄한 밤입니다. 삶이 캄캄하고 환경이 어두운 사람과 함께 할 때 우리의 별은 더욱 빛난다는 교훈입니다. 최근에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어렵고 힘든 교우들과 함께 나누었어요. 나눔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캄캄한 데서 별은 그렇게 하면서 빛나는 것입니다.

이 계절은 시인의 시구처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계절이길 바랍니다. 언젠가 제 카톡의 제목에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하고 쓰고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말은 저의 참회의 표현이었어요. 어느 곳에 여행을 갔는데, 그곳은 아는 선교사가 사역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만나면 내가 귀찮아지고 손해 볼 것 같은 생각에서 연락하지 않고 그대로 떠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기적인 나 자신을 한없이 자책하고 뉘우치면서 그런 제목을 붙였어요.

아기 예수에게 동방박사가 예물을 드린 것처럼, 우리는 모든 죽어가는 것, 나약한 사람, 아픈 사람,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잠시라도 기억한다면 우리 역시 동방박사처럼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복음서에는 그 일이 기록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복된 성탄의 계절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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