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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야고보서 5:19-20)
최영모 [beryoza]   2019-12-08 오후 9:48:54 324

오늘로서 야고보서의 설교를 마친다. 설교에서도 언급했지만 야고보서의 결론에서 전도를 발견한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다.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야고보서 5:19-20)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오늘 야고보서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본 것처럼 야고보는 무엇인가를 특별히 강조하고 싶을 때, 아니면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려고 할 때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하면서 친근감을 드러내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도 야고보의 그런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대교회 때도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진리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야고보에게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드러내신 구원의 길이 진리입니다. 진리에서 떠난다는 말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겠다고 하지만 이상하게 믿고 있거나, 잘못된 길을 가는 이단이거나, 아니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모두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진리에서 떠나는 것일까요? 야고보서 전체의 맥락에서 본다면 믿는다고 말만 하고선 행함 없이 살다 보면 진리에서 떠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할 때 주위 사람들은 진리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저런 것이라면 난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야고보에게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물론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지식이 곧 신앙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극장에 가서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그냥 그걸로 끝나도 되는 거예요. 눈물이 나면 흘리면 되고, 진한 감동이 왔을 때 가슴 가득 느끼면 되는 거예요. 극장 문을 나서면서 다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영화의 교훈을 꼭 실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설교는 영화와는 달라요. 설교를 들으면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말씀이 생활화되고 인격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단지 지식만 있는 믿음을 야고보는 죽은 믿음이라고 했어요. 귀신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두려워합니다. 귀신은 우리보다 지식으로는 훨씬 더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동으로 살아내지는 못해요. 그래서 귀신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성장이란 자신이 교회에서 듣고 배운 것을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실천해갈 때 이루어지는 거예요. 매 주일 듣는 설교를 크게 실천하면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것이고, 적게 실천하면 영적으로 조금 성장하는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더라도 영적으로 전혀 성장하지 않는 것이고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거예요.

지난 주일 설교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일이 생기면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은 교회에 알리고 약을 사용하여 치료하며 서로서로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었다면 그러면 나에게 적용하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하고 고민하면서 한 주간을 보내야 하는 거예요.

신앙이란 철저히 실천이 수반되어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신앙이 바로 서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의 내면은 늘 텅 비게 되어있습니다. 텅 빈 내면을 감추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위선이나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키르케고르의 표현처럼, 호두껍데기같이 닳고 닳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자세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방해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한 소년이 비치 파라솔을 펼치며 쉬고 있는 부인을 보고서 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크리스천인가요?”

그렇단다.” 부인이 대답했어요.

매일 성경을 읽고 있나요?”

물론이지.”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기도도 자주 하나요?”

그래하고 부인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마지막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럼 내가 수영하는 동안 내 동전 좀 맡아주실래요?”

소년은 진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자기의 돈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우리 크리스천은 어떤 모습일까요? 과연 우리에게 자신의 돈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할까요?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믿어줄까요?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나 자신도 진리를 떠나게 되지만, 나를 본 다른 사람까지도 진리에서 떠나게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진리에서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애를 마치면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입니다. ‘나는 이제 하늘 아버지에게로 가니까 너희가 나 대신 이 일을 해다오하셨어요. 그래서 그 일을 우리는 great commission, 대위임이라고 합니다. great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보통이 아니라 매우 소중하고 아주 특별한 것을 말해요. 러시아의 황제 중에 Peter the Great 하니까 피터대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단순한 황제가 아니라 위대한 황제라는 뜻입니다. 대위임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맡기신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러시아에 온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그러니까 꽤 오래전 일입니다. 신학교에 가는 길에 달러를 루블로 바꾸려고 환전소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점심시간이라 환전소는 문을 닫았고(그때는 점심시간도 두 시간이나 되었어요), 기다리는 줄은 상당히 긴 거예요. 이러다가 신학교 강의에 늦겠는데 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자기는 달러가 필요하니 자기하고 맞바꾸자는 거에요. 시간이 없었기에 그 제안이 솔깃하였습니다. 그러자고 했더니 나에게 돈이 있는지 보여달라는 거예요. 달러를 보여주면서, 당신에게는 루블이 있느냐 하였더니 접힌 큰돈 두 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바꾸어서 말하자면, 100달러에 만 루블이라고 합시다. 오천 루블짜리 두 장이 접힌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는 듯 얼른 자기 주머니에 다시 돈을 넣었어요. 그래서 서로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제가 100달러를 주자 그 사람도 자기 주머니에서 조금 전에 꺼내 보여주었던 루블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은 왼쪽으로, 저는 오른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 느낌이 좀 이상해요. 그래서 조금 전에 환전한 돈을 꺼내보니 겉에 한 장만 큰돈이고 안에는 잔돈이 들어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만 루블이 아니라, 5100루블인 셈입니다. 얼른 돌아보니 그 사람은 저만큼 멀리 가고 있었습니다. 눈이 가득 쌓여 미끄러운 길이었지만 막 쫓아갔어요. 그 사람과의 거리가 10~15m쯤 가까워지자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이 뒤돌아보았습니다. 저는 200m 정도 달려왔기에 숨이 찼지만, 태권도 하는 폼부터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내 돈 달라고 하자 그 사람이 순순히 100달러를 돌려줬어요. 제 폼이 상당히 그럴 듯 했나봐요. 달러를 돌려줬으니 자기 돈 루블을 돌려 달라는 했어요. 아직도 기분이 나빠서 씩씩거리면서 얼른 돌려주지 않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어요. “에또 마야 라보따.”(이것은 나의 일이야)

에또 마야 라보따사기꾼의 그 말이 참 뻔뻔스럽긴 하였지만, 생각해보면 그는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어요. 자기 일이라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대위임이라는 일을 주셨습니다. 그분을 주님이라고 믿는 모두에게 주신 것이지, 특정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온전한 믿음, 혹은 성숙한 믿음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결론에서 대위임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을 돌아서게 하면 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사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기 전까지 야고보서에서는 전도를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야고보서의 마지막 결론이 전도라는 사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제 가슴이 뛰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표어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입니다. 그 말과 일치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일, ‘에또 마야 라보따’, 우리의 일입니다. 저의 일이고 여러분의 일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면서 친구와 만나면서 어떻게 하면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할까 하고 관심과 기도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내 옆에서 영혼이 죽어가는 데도 관심이 없다면 나의 믿음은 심각하게 병든 것입니다. 내 옆에서 영혼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도 관심이 없다면 내가 정말 거듭난 그리스도인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아야 합니다.

얼마 전 한국에 갔을 때 저를 아는 권사님 두 분께서 어떤 자리에 저를 초대하였습니다. 초대한 목적은 자기들과 가까운 A라는 권사가 있는데, 이 권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하면서 제가 어떤 조언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A 권사가 왜 잘못인지를 두 권사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A 권사에게 일어나는 일상의 모든 일을 선교사 출신인 한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결정한다는 거예요. 편의상 그 할머니는 B라고 지칭하겠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A는 자기 아들의 혼사 문제를 B에게 물었더니, B는 말하기를 내가 기도해보니 아들하고 얘기되는 그 여자는 뒤 엉덩이에 더러운 꼬리가 붙어있으니 결혼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답니다. 자신이 기도하면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이 다 알려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A의 아들이 사업을 하는데, 그 사업에 대해서도 B는 기도해보니 잘될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사업을 시작하면 얼마 못 가 말아먹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BA에게 아들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만 더 바로 서면 사업도 한 방에 터질 거라고 한답니다. 그렇게 아들이 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시작했다가 실패한 것이 2년 사이에 너덧 번은 된답니다. 물론 그때마다 B는 아들이 믿음으로 조금만 더 나가면 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실패하는 거라고 말하고요.

여러분은 A 권사와 선교사 출신인 B의 행동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B와 같은 사람을 흔히 기독교 점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두 권사와 함께 A를 만나 대화를 했지만, A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B에 대한 신뢰가 상당하였어요. 그런데 지난 주간에 두 권사님께서 A를 만나 B와 관련된 잘못된 것을 말하면서 설득하자, A가 그 조언을 받아들여 B와는 거리를 두겠다고 했답니다. 저에게 그 소식을 전하는 분이 매우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그랬지요. ‘여러분이 목사보다 더 낫습니다.’

새벽까지 그 문제로 대화하고 피곤한 상태에서도 그 소식을 저에게 전하는 분의 목소리는 매우 밝았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을 바른길로 돌아서게 했다는 것 때문에 피곤이 피곤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나고 기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는 돌보고 구출해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지 판단과 정죄가 우리의 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잘못된 길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도 무관심한 것, 그것도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본의 한 여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밤중에 복면강도가 침입하여 잠자던 여학생들을 칼로 위협하면서 값비싼 물건을 모두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학생들은 무서워 벌벌 떨면서 갖고 있던 돈과 패물을 모두 내주었습니다. 강도는 물건을 다 챙겨 나가려는데, 한 여학생이 소리칩니다.

아저씨, 책상 위에 있는 저 값진 책도 갖고 가세요.”

그 말에 강도는 책상 위에 있던 낡은 성경책을 얼른 가방에 넣고 사라졌습니다. 강도는 빼앗은 물건을 내다 파는데, 낡은 성경책을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여학생이 나를 속이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한 강도는 도대체 이 책이 왜 값진 거라는 거지 하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강도는 회개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전도자가 되어 여러 곳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어요.

이 강도가 어느 교회에 가서 자기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간증을 하는데, 앞자리에 앉은 한 여인이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간증이 끝나고 광고 시간에 이 여인이 앞으로 나가서 자기도 간증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그 옛날 여자 기숙사에서 강도에게 성경책을 준 그 여학생이 바로 접니다. 그 사건 후로 그 강도를 위하여 늘 기도해왔는데, 오늘 이렇게 훌륭한 전도자가 되어있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책만 주어도 구원받을 사람이 있고, 영적인 책 한 권만 선물해도 교회에 나올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책을 줬더니 보는 앞에서 그 책을 찢어버리고 던져버렸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찢어지고 버려진 한 장을 주워서 읽다가 도대체 이것이 뭘까 하면서 궁금하여 교회로 나가기 시작한 사람도 있고요. 지난 주일 설교에서 잠시 언급한, 양복을 위해서 저와 함께 서로 기도했다는 그 청년은 길을 가다가 전도지 한 장 받고는 교회에 나온 사람입니다. 살짝 건드려만 줘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영생의 길로 돌아서는 사람이 많아요.

성경을 라틴어로 처음 번역한 사람 가운데 제롬이라는 수도자가 있었어요. 그가 성경 번역을 하다가 깊은 묵상에 잠겨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제롬은 감격하면서 말했어요.

주님, 제가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요? 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저에게 있는 것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미소지으며 말씀하셨어요. “천하의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이다. 하늘과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인데, 네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니?”

주님, 사랑합니다. 수도원 생활이라 가진 것은 없지만, 저에게 돈이 좀 있는데, 이것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이 돈을 받아주십시오.”

예수님은 계속 미소지은 얼굴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서 필요한 그 돈은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나에게는 필요 없다.”

제롬은 다시 간청합니다. “어떻게 주님을 그냥 보내드릴 수 있습니까? 무엇을 드리면 좋을지 제발 말씀해주세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제롬, 내가 기뻐하는 선물을 하고 싶다면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과 부활한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리하여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라. 그것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없단다.”

오늘은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주님 오심을 준비한 사람 가운데 세례 요한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증언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온 종교지도자들, 그러니까 서울 중심부에서 내려온 종교지도자들이 너는 누구냐?” 하고 물었어요. 요한의 이름과 직업과 출신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하는 물음이었어요, 그때 세례 요한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말씀으로 대답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대답합니다. 소리라는 단어가 참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이라면 요한은 그 말씀이 전달되는 소리입니다.

요한처럼 우리도 소리입니다. 소리가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게 되면 말씀이신 주님은 전해지지 못합니다. 소리를 내지 않으면 주님을 벙어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부르게 되는 찬송가의 가사에서도 우리가 소리를 내는 일을 천사가 흠모한다고 하였어요. 천사는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을 돌아서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특권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한 세상에서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 은총을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거듭난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거룩함을 추구하고 사모하여야 합니다. 거룩함을 추구하고 사모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이들을 돌아서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야고보서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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