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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과 맹세(야고보서 5:12)
최영모 [beryoza]   2019-11-17 오후 9:15:27 93

서원과 맹세(야고보서 5:12)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한 역사학 교수가 제자이자 애인이었던 여성을 토막살해하여 모이까 강에 버리다가 경찰에게 체포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타락한 지성인의 모습에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도서관에 윈도우 온 코리아’(Window on Korea)라는 이름으로 한국자료실이 개설되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한국에 대하여 더 잘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서원이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맹세란 어떤 약속이나 목표를 꼭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주제는 맹세하지 말라는 것인데, 성경에는 맹세와 서원이 다르게 쓰이기도 하고,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1. 서원

중학교 교사인 A라는 여성의 얘기입니다. 청년 시절 어떤 선교집회에 참석했어요. 거기서 결단의 시간에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선교사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를 만났을 때 그 얘기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독신으로 사역하고 있는 B라는 여성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 선교사의 부모님께서 성경에 나오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얘기를 알고 있었던가 봐요. 그래서 우리에게도 아이를 주시면 목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서원했어요. 어떤 분들은 자녀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목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은 한나보다 한술 더 떠 아예 이렇게 기도하였대요.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게 하겠습니다.’ 마침내 그 가정에 딸아이가 태어났고, 그 딸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결혼을 하고 싶어도 부모님의 서원이 마음에 걸려 결혼하지 못하고 혼자 사는 거예요.

부모님이 서원하였던지, 본인이 서원하였던지 성경은 이런 경우를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민수기 30장에는 여자가 한 서원은 그 아버지나 남편이 취소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서원한 것은 아버지가 취소할 수 있고, 결혼한 여자가 서원한 것은 남편이 취소할 수 있어요. 선교사로 나가는 서원을 한 A라는 여성은 아버지나 남편이 파기할 수 있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B라는 여성은 자신이 한 서원이 아니라, 부모가 한 서원입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여자가 서원하면 취소할 수 있지만, 남자가 서원하면 취소할 수가 없고, 꼭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가 성경에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아요.

남자가 서원하였다가 취소하지 못한 대표적인 경우가 구약 사사기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정 시대 이전에 사사 시대가 있었습니다. 사사란 지역의 재판장도 하면서 아직 왕이 없었기에 지도자로 통치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입다라는 사람이 사사로 있을 때, 암몬 자손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입다는 그들과 전쟁을 하려고 나가면서 이런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암몬 자손을 이기게 해주시면 내가 돌아올 때 누구든지 먼저 나를 맞으려고 나오는 사람을 주님에게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전쟁에서 꼭 이기게 해주세요.”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불에 태워서 제사를 지내겠다는 것이거든요. 물론 하나님이 그런 제사 방법을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인신 공양이라는 이방 종교의 풍습을 보고서는 그런 행동이야말로 대단한 헌신일 거라고 하면서 그렇게 서원한 것이었어요.

전쟁은 입다의 큰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오니 소고를 치고 춤추며 그를 맞으려고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은 바로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습니다. 아버지 입다는 기절초풍할 일이었어요. 이름처럼 그만 엄청난 충격을 입다가 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서원을 취소하면 큰 벌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입다는 자기 딸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 서원을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셨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그런 서원을 원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서원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솔하게 서원을 하는 것은 물론 나쁘지만,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에는 반드시 지키라고 했어요. 그러나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는 신약의 눈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한 것을, 너희는 또한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아라. 너희는 '' 할 때에는 ''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5:33-37)

서원도 맹세의 한 종류인데,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서원하는 것은 주로 물건을 바치는 것이었어요. 따로 기업을 받지 못한 레위 지파에게 물건을 바치거나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것을 꼭 지켜서 레위 지파가 염려하지 않고 성전 일을 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 서원을 지키지 못할 때는 위약금을 좀 더 내는 것으로 해결하였습니다.

신약의 눈으로 볼 때, 서원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어요. 한 학생이 부모에게 나는 대학을 법대로 가서 변호사가 되겠어요하고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로 유학을 왔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자기의 능력이나 적성에 맞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포기하고 전공을 바꿨는데, 그것을 가지고 꾸중하고 책망하는 부모라면 결코 좋은 부모가 아닙니다. 인간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은 더욱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이 신약의 교훈입니다.

서원을 지키지 못했어도 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으로 서원한 것이라면,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으로 서원한 것이라면 지키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라 죄송하지만, 저는 하나님 앞에서 크게 세 번의 서원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군복무와 관계된 것이었고, 둘째는 청년 시절에 교회당 건축헌금에 대한 것이었으며, 셋째는 선교사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군대 얘기라고 하니까 첫째 얘기는 생략하고요.

매우 가난했던 대학생이었을 때, 부흥회에서 교회당 건축헌금을 약속하였는데, 그 당시의 저에게는 매우 큰 액수였습니다. 약속은 했지만 갚을 능력이 있어야죠. 어떨 때는 내가 부흥회 분위기에 휩쓸려 그만 약속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칠 때가 있었습니다. 7년이 지난 후 교회 전임사역을 하면서 겨우 갚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고두고 생각해도 그 일은 잘 한 것 같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었다고 확신합니다.

또 하나는 신학생 시절에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선교사로 나갈 사람 손 들라고 하여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순종하여 러시아로 왔습니다. 지금도 선교사로 나온 것은 저에게 매우 큰 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자발적인 마음에서, 그리고 더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서원을 하였는데,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벌은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서 서원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키는 것이 복입니다. 늘 하나님에 대하여 열려있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소원을 주면서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그럴 때 한 서원이나 약속이라고 한다면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백번 더 나은 것입니다.

 

2. 맹세

성경에는 맹세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베드로의 맹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하셨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어요.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야, 내가 진짜로 너에게 말하는데,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할 거야.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이야, 세 번.” 베드로는 결국 맹세한 것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가만 보면 정치인들도 맹세를 잘해요. 제가 언뜻 기억하는 것만 해도,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선거에 패배하면 낙동강에 빠져 죽겠다고 말한 후보가 있었어요. 그런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탄핵당하면 자살하겠다고 한, 전직 아나운서인 여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겠다고 말한 여성은 막상 탄핵이 되자 자살은 죄라고 하면서 왜 내가 죽느냐고 항변하였어요. 참 묘한 것은 그렇게 말한 지 2년이 채 못되어 그 여성은 폐암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맹세한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어요.

조선 시대에도 거짓 맹세를 하였다가 자손이 장님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아들들이 형제간에 피비린내가 나는 싸움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험한 꼴을 보게 된 태조는 열불이 터져서 어렸을 때 자랐던 함흥으로 가버렸어요. 태종은 그런 아버지를 달래려고 여러 번 사람을 보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함흥차사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오는 말인 것은 아시지요?

고집불통 아버지를 어찌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태종에게 성석린이란 사람이 찾아왔어요. 자기가 함흥에 가서 태조의 뜻을 돌이키겠다는 것입니다. 태종은 당신이 간다고 될까?” 하였지만, 성석린은 자신은 태조의 옛 친구로 가서 설득해보겠다고 하였어요. 태종이 허락을 하자, 성석린은 나그네 옷차림을 하고는 태조가 사는 곳 근처에 가서 불을 피우고 밥을 하는 척하였습니다. 태조가 그 광경을 바라보니 좀 이상해 보여서 신하를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어요. 성석린이 자기 이름을 밝히며, “일을 보려고 지나가는 길인데, 날이 저물어서 말을 매고 하룻밤 유숙하려고 한다고 하였어요. 신하에게서 그 말을 들은 태조는 나그네가 자기의 옛친구라는 것을 알고는 기뻐하며 그를 불렀습니다.

태조와 함께 식사하면서, 성석린이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인륜의 도리라며 어쩌고저쩌고하니까 태조의 안색이 확 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더냐?” 하자, 성석린이 이렇게 대답하였어요. “신이 만약 그 일 때문에 왔다면, 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 나는 단지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난 것입니다.” 맹세하면서 그렇게 말하니까 태조는 그 말을 믿었고, 그 뒤로 태조와 태종은 겨우 화합이 되었어요. 성석린의 목적은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성석린의 두 아들은 그 뒤에 눈이 멀었고, 심지어는 손자까지 장님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거짓된 맹세는 유익보다는 해가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할까요? 하나는 분명히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대통령이 탄핵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거예요. 또 다른 하나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렇게 말해야만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오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진실을 말했어요.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해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는 그들을 말로 다 설득할 수 없다는 것, 이것도 알아야 합니다. 왜 믿어주지 않느냐고 항의해도 소용없어요.

진실을 말해도 오해하고, 진리를 말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과연 내가 참말을 하고 있느냐, 이것을 우리는 늘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이 오해하거나 믿어주지 않는 것에 대하여 신경 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을 상대방이 오해하거나 믿어주지 않으니까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믿도록 하려고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맹세입니다. 내 말을 믿어주지 않으니까 맹세까지 하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맹세라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야고보는 맹세가 나쁘다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그 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다만,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라고만 하고, ‘아니오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라고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맹세하면 심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맹세하는 것을 나쁘다고 하지는 았어요. 구약의 초기 기록들인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런 곳에 보면 맹세하라라는 말씀들이 있거든요. 심지어는 하나님도 아브라함과 약속하면서 맹세를 하셨습니다. 중요한 약속 앞에서 서로 의심이 들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함으로써, 서로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맹세는 하면서도 그 맹세를 지키지 않는 거예요.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맹세를 이용하기도 하고요. 결국은 맹세가 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맹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기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맹세하지 말아야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맹세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말하면 믿어주도록 자신의 인격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믿을 수 있어.’ 하는 자리까지 우리의 인격이 도달하여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말은 곧 인격이라고 합니다. 맹세로 말하지 말고 인격으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투 가운데 솔직히 말해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저는 그 사람이 별로 정직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라고 자주 말하는 사람은 사실 솔직히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 사람의 일상에는 솔직한 것과 솔직하지 않은 것이 늘 섞여 있는 것이지요. 언제나 솔직한 사람은 굳이 솔직히 말해서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늘 솔직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말버릇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의 습관적 말투이기도 한데요. 제 주변의 러시아인이나 교포(고려인)들에게서 여러 번 들었던 말입니다.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의 인사말로 쓰이지만,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듣는 사람들도 있어요. 누구에게는 이 말이 거짓말로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인격까지 떨어뜨리는 셈이 되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이것은 목사들도 자주 하는 말입니다만,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목사들, 선교사들의 단톡방이 있는데, 누가 어려운 문제를 말하면 별로 친분 있는 사람 같지도 않은데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답이 많이 올라와요. 제가 좀 못되어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기도하겠습니다하고 말한 사람이 정말 어려운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진심으로 기도해줄 생각이 아니라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목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좋아하거나 말거나 하여간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선 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을 하는 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만나게 되면 우리는 맹세라든가 헛된 것으로 우리를 포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학력으로 포장하고, 말 잘하는 것으로 포장하고, 권력과 힘으로 포장하고, 재물과 돈으로 포장하고, 외모로 포장하고, 잘 믿는 척하는 믿음의 위선으로 포장하는 것은 아직 예수님을 진실로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그분과 깊은 사귐에 들어가면 그런 포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반정부 비밀모임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갑니다. 그곳에 갖고 간 신약 성경을 닳고 닳도록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유형에서 돌아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인다고 해도, 나는 진리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 곁에 머무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 후로 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은 문학으로 표현된 가장 훌륭한 성경주석이라는 명예를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 가운데 헛된 것이 너무나 많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노력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님을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할 때 하고, ‘아니오할 때 아니오하는, 단순하고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길이며,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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