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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믿음의 증거(야고보서 5:7-11)
최영모 [beryoza]   2019-11-10 오후 9:16:49 514

인내-믿음의 증거(야고보서 5:7-11)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인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알면서도 현대인은 갈수록 인내에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분이지만, 우리 교회에서 동역하시던 알렉산드르 로긴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이 초청을 받아 한국에 다녀오면서 한국어 단어 하나를 배워 갖고 왔어요. 무슨 말이었을 거라고 여러분은 추측하십니까? “빨리빨리라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무엇인가를 독촉이라도 하면 빨리빨리?”하고 한국말로 되묻곤 하였는데, 그 표정이 그다지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운전할 때 보면 신호등이 바뀌었는데, 앞차가 얼른 움직이지 않으면 뒤차가 금방 곧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이 조금이라도 느려지면 매우 답답해합니다. 스마트 폰의 기능들도 느려터지면 아웃 되기 쉽습니다. 슈퍼마켓에 가서 보면 짧은 시간에 조리하도록 만들어진 음식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마치 인내가 없는 시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 디모데후서에는 말세가 될 때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를 사람들이 절제하지 못하고 조급해진다고 하였어요(3:3-4).

오늘 본문에 보면 다섯 구절 속에 오래 참는다’, ‘참는다’, 혹은 인내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여섯 번 가운데 두 번은 일반적인 의미의 인내라는 단어(쉬퍼모네)를 사용하고 있고, 네 번은 인간관계에서의 인내를 의미하는 단어(마크로두미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설교학 교수님은 우리에게 설교할 때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씨부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교수님의 명을 어기고) 쉬퍼모네, 즉 일반적인 의미의 인내란 아픈 것을 참는다거나, 배고픈 것을 참는다거나, 추위나 더위를 참는다고 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반면 마크로두미아, 인간관계에서의 인내는 다른 사람이 나를 서운하게 할 때도 참는 것이고,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되지 않아도 참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간관계에서의 인내라는 단어 마크로두미아를 일반적인 인내라는 단어보다 두 배나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관계에서의 인내가 힘들기도 하지만,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추운 것도 견딜 수 있고, 아픈 것도 참을 수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섭섭하게 하면 참 견디기 힘들고 가슴이 아픕니다.

남편과 아내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싸움을 했습니다. 남편이 성질을 못이기고 베게 밑에 보관하던 방범용 나무 방망이로 아내의 어깨를 때렸습니다. 아내가 죽여라, 죽여라하고 소리치자 남편은 아내의 얼굴과 머리 부분을 마구 때렸습니다. 이 폭행으로 아내는 머리를 많이 다쳐 피를 흘리고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법정에서 남편은 내 목숨을 주고라도 아내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겠다.”하고 후회했지만 늦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참는다는 것이 참 힘든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 누가 이길까요? 목소리 큰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참을 수 있고, 미소까지 지을 수 있다면 완전히 승리한 것입니다. 서운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KO로 완벽하게 승리한 것입니다.

구원에는 과거 시제의 구원이 있고, 현재시제의 구원이 있으며, 미래 시제의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입니다라는 신앙고백 한 번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아요. 그것은 과거 시제의 구원이며, 신앙의 출발일 뿐입니다. 현재시제의 구원은 거룩한 삶, 거룩한 인격으로 가기 위하여 부단히 인내하고 노력하며 수고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머무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은혜 때문에 눈물도 흘려보았습니다. 헌신도 다짐하였습니다. 은사도 받았습니다. 체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속에 물들어가고, 삶이 주는 안락함에 물들어가고, 돈이 주는 유혹에 물들어가면서 그만 헌신에 게을러지고, 기도에 게을러지고, 믿음에 게을러집니다. 인내를 잃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내가 없다는 것, 참지 못한다는 것은 곧 믿음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 대하여 늘 시비를 건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당신은 사도가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어야만 사도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았다라는 것으로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주 자기가 사도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이 세웠던 고린도 교회 안에도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하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해요.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일일이 참고 견디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표징으로 삼아 사도가 된 표징을 행하였습니다.”(고후 12:12) 바울이 사도가 된 표징을 내세울 때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이 바로 참고 견디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참고 견디는 것이야말로 능력보다 중요하고, 기적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지 못합니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인내하지 못합니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10번이나 참았지만 더는 도저히 못 참겠다고 하시렵니까? 그것은 10번을 참은 것이 아니라, ‘두고 보자하면서 10번을 견딘 것입니다. 벼르면서 견딘 것을 인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내가 이토록 중요하기에 야고보서에서는 인내를 매우 강조합니다. 야고보서를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인내하여야만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된다고 야고보 서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1:4).

그러면서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는 언제까지 인내할 것인가, 어떻게 인내할 것인가, 인내의 보상은 무엇인가, 이렇게 인내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언제까지 인내할 것인가를 말하며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를 말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게 되면 그 식물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아무리 급해도 중간에 덜 익은 채로 농작물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축구 경기 중에 상대방 선수에게 태클했는데, 그만 상대방 선수가 골절상을 입으면서 크게 다쳤습니다. 그래서 퇴장까지 당하였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반칙한 손흥민 선수를 동정하며 그는 인성이 매우 착하다는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손흥민 선수가 쓴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책에서 그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제 모습이 화려해 보이겠지만 그건 저의 겉모습일 뿐입니다. 힘들었던 과거와 뒤에서 이뤄지는 노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죠. 지금의 화려함보다 어렵고 캄캄했던 날이 훨씬 더 많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뛰고 있어요. 제가 책을 내게 된 이유는 지금 이 자리에 올라올 때까지 있었던 저의 뒷모습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제 인생에서 공짜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드리블, 슈팅, 컨디션 유지, 부상 방지 등은 전부 죽으라고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믿어요. 어제 값을 치른 대가를 오늘 받고, 내일 받을 대가를 위해서 오늘 먼저 값을 치릅니다. 후불은 없죠. 지금도 제 자신과 싸우고 훈련하면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어요.”

성경은 성도의 삶을 경기하는 선수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손흥민 선수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인내가 꼭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인내해야 할까요? 야고보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끝까지 인내하라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까지 인내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떤 결실이 나타날 때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야고보는 고난을 견디어 낸 예언자들을 언급하면서, 그들로 본을 삼아 인내하자고 말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이런 예언자들이 당한 고난, 예수께서 당한 고난, 이런 것을 생각하면 나의 고난은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아이가 말썽을 부린다, 공부를 안한다 하면서 불평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부모들에게 저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요. 정신지체아들이 있는 곳에 가서 하루만 봉사해보라고요. 그런 아이들을 보면 자기 자녀가 건강한 것 하나만 갖고도 감사하게 됩니다. 자녀가 공부 안하는 것, 말썽 좀 부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휴가나 방학을 이용하여 종종 이웃에 있는 유럽의 나라들을 여행합니다. 그런데 잘사는 나라들만 가지 마시고, 때로는 매우 가난한 나라들도 가보세요. 그런 곳을 여행하고 나면 지금 나의 일과 나의 삶이 힘들다고 불평하며 탄식한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셋째로 야고보는 인내의 결과를 말하기 위하여 욥을 인용합니다. 욥은 고난을 참고 견딘 후에 몇 배로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려운 순간들을 잘 참고 견디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최아름 집사님을 통하여 그 사실을 좀 더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이 자리에 서서 부족한 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매우 부끄럽고 민망하여 많이 망설였지만, 조심스럽게 제가 경험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해보려합니다.

22살이 되던 2, 아버지가 갑작스레 중동지역에 7년근무로 발령을 받으셨습니다. 아직 학생인 동생은 데리고 가시고, 대학교 3학년인 저는 학교 앞에 작은 방을 얻어줄 테니 잘 먹고 잘 살고 있어~”라고 하시더군요. 부모님이 7년 동안 지내실 짐을 정신없이 꾸려서 해외이사를 보내고, 저 또한 3월 개강을 하고, 문득 느껴지는 외로움과 함께 홀로 남은 한국에서 정신없는 한 학기를 보냈습니다. 학교와 과가 소위 빡세기로 소문이 난 터라, 학기 중에는 그저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6월 초가 되어 종강을 하고 나니, 학교에 바글바글 하던 친구들이 썰물처럼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허허벌판 시골에 덜렁 있었던 학교라, 학교 앞에 혼자 남은 저는 그때 정말 처절한 외로움을 맛보았습니다. 고향도 떠났고, 가족도 없이 혼자라는 생각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집에 있으면서 혼잣말을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입을 뗄 일이 없단 사실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혼자 먹을 밥상을 차리다가 김치통을 엎었는데, 옆에서 괜찮아?”라고 묻는 사람도 없이 혼자 사방팔방 튄 김치 국물을 닦으며 서러움이 폭발하기도 했습니다.

길고 외로운 방학동안, 제가 사람을 만나는 날이 일주일에 딱 하루 있었습니다. 주일이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있는 교회였고, 성가대에는 학생 없이 어른들만 계셨는데, 제가 왜 그곳에서 성가대로 봉사를 하게 되었는지는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성가대에서 홀로 바이올린 반주를 하느라 참 바쁜 주일을 보냈습니다. 연습이 끝나고는 청년부 언니오빠들과 저녁도 먹고 하면서 조금씩 친해졌습니다. 그리고는 같이 영화도 보고, 교회 일도 돕기도 하고.. 특별새벽기도회에 가자고 하면 가고, 무언가 하자고 하면 같이 했습니다. 사실 멋진 교회오빠가 있었던 것도 아니였고, 새벽기도회가 은혜로워서 사모하는 마음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새벽기도 후 같이 먹는 국밥이 맛있었고, 무엇보다 외로움이 힘들었던 저는 함께 시간을 보낼 무언가가 필요하다보니 그저 그냥 교회의 울타리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시 개강을 하고도 주중에는 학업과 기독중창동아리 활동으로, 주일엔 성가대와 연습으로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4학년이 되었습니다. 졸업과 취업을 앞둔 시기이지요. 사범대에 다니고 있던 저도 졸업시험과 졸업연주, 그리고 임용고사를 앞둔 중요한 1년이였습니다. 무엇하나도 중요하지 않은게 없었기 때문에, 참 치열하게 지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조건 도서관에 앉아서 큐티를 짧게 하고, 학과 공부와 졸업연주 연습, 임용고사 준비까지 나름의 계획을 세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모든게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졸업시험은 바로 전날까지도 모르는 것 투성이였고, 렛슨 시간엔 항상 교수님 꾸지람에 우울했습니다. 그래도 안할 수 없고, 포기 할 수는 없으니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이 길이 맞나, 가능한 것을 도전하고 있기는 한가...라는 생각이 들 때 마다 이 학교는 하나님이 보내주셨다는 확신이 있었던 저는 이 길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 또한 하자면 길지요. 어쨌든, 제가 다니던 학교는 모든 과가 사범대였기에, 제가 보고 달릴 길이 하나였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기들도 다들 예민해지고, 바빠졌습니다. 임용시험 뿐 아니라 졸업연주까지 함께 준비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였습니다. 그러던 중 직언하기 좋아하는 한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이렇게 바쁘고 중요한 때에, 너랑 00이는 기독중창단 활동이며,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살다오고, 너무 시간낭비 하는거 아니냐구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매우 속상했습니다. 정말 시간에 쫓기고 있던 터라, 손해 보고 있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푸념할 데가 하나님밖에 없어서 투정을 부렸습니다. 하나님, 저랑 00이랑 하나님일 하는 거 친구들이 다 아는데, 저희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 시험에서 떨어지면 하나님이 창피하신 거니 저희 책임지시라구요.

시험 날이 가까워져 오고, 각자 시험을 치를 지역 교육청에 가서 시험 접수를 하고 오니 제겐 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경기도로 응시를 한 지라, 시험장소가 경기도 수원에서 아침 일찍부터 치뤄지는데, 전라도 출신인 저는 수원 근처에는 연고도 없고, 엄마도 안계시니 혼자 근처 모텔 같은 곳에서 자기는 무서운데, 딱히 방법이 없어 혼자 가야하나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정집사가 혼자 수원에 살고 있었을 때였는데, 미래의 자기 짝꿍이 잘 곳이 없어 이리 큰 근심 하고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겠지요.

그러던 중 임용시험을 한달 앞두고 학원가에서 하는 모의고사를 보러 친구와 함께 3번 정도 노량진 학원에 다녀왔었습니다. 임용고사 바로 일주일 전, 마지막 모의고사를 보고 학교로 돌아가려고 가던 중에 육교에서 우연히 3년 전에 졸업한 같은 과 선배를 마주쳤습니다. 1학년 때 4학년 선배였으니 하늘같이 무서운 선배였는데, 같은 동아리였어서 조금 서로 소식정도 아는 정도의 사이였습니다. 마주친 곳이 노량진이니 선배도 시험 준비 중이였구요. 어느 지역으로 시험 보냐고 물으시길래 경기도로 본다하니 선배가 ! 나도 경기도로 보는데, 근데 아름아 너 집이 여수 아니니? 시험 볼 때 어디서 자? 잘 곳 없으면 우리집에서 자!” 하시는 겁니다. 내 필요는 하나님이 아신다더니, 이렇게 저의 근심을 풀어주셨습니다.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로 돌아와서, 남은 일주일 간 남은 공부를 정리하는데 심난함이 더 해지더군요. 시험이 코 앞인데, 모르는 내용도 많고, 교육학 모의고사 점수는 엉망이고..몇 달만 더 있으면 딱 좋겠는데..매일이 이 기분이였습니다. 시험전날, 눈에도 잘 안 들어 오지만 습관처럼 큐티책을 폈는데...그날 묵상이 잠언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는 말씀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심하라고 주신 말씀이였던 것 같은데, 마음으로 경건함보다 그저 성전 뜰만 열심히 왔다갔다 한 것 같은 그 당시의 저는 뒷부분 말씀 때문에 더 두렵기만 했습니다.

시험전날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선배집에서 자고, 시험당일 선배 남편분이 새벽같이 나가 김밥천국에서 사다주신 도시락을 가지고, 데려다 주신 시험장까지 편히 갔습니다. 긴장하며 시험을 치르는데, 전날 잠들기 전 누워서 본 책에서 시험문제가 꽤 나왔습니다. “올레, 하나님 땡큐예요를 연발하며 시험을 잘 치뤘습니다. 이 후 1, 2차 시험을 모두 치룬 후 결과는 생각했던 것 보다 매우 좋았습니다. 합격자 60여명 중에 재수없이 졸업 후 바로 합격한 경우인, 소위 현역이 딱 2명이였는데, 그중 하나였고, 그것도 매우 좋은 성적이였습니다. 그냥 꼴지라도 합격만 시켜주시면 되는데, 엄청난 결과에 다 제가 한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누가 어떻게 그리 되었냐 물으면, 전 다 하나님이 하신 것 같았습니다. 전날 보고 잔 책에서 많이 나왔고, 그 험난한 졸업의 과정가운데도 여기서 세세히 다 말할 수 없는 하나하나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좋은 운이 제겐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내라는 것은 잘 모릅니다. 일부러 인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일부러 견디어 낼만한 그런 훌륭한 사람도 아닙니다. 제가 의지할 건 하나님 밖에 없었고, 그것도 할 수 있는 깜냥것 하나님 울타리 안에 머물면서, 포기하는 것 대신 단지 제가 할 수 있는, 객관적으로 부족할 지라도 저의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때론 하나님께 투정도 부리면서요. 그게 하나님 보시기엔 인내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다 듣고 계시고, 다 살피고 계십니다. 내가 지나가듯 했던 기도도 다 들으시고, 항상 우리의 생각보다 더 좋은 것을 예비해두고 계십니다. 제가 이 곳 러시아에 와 있는 것도 기대치 않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선물같은 예비하심이라 생각합니다. 단지 앞길이 보이지 않고, 준비해 두신게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아 힘들게 느껴지고, 지나가야만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내가 뼈저리게 느꼈던 외로움도, 지금의 제겐 누군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였고, 나를 외롭게 하여 하나님을 온전하게 바라보게 하시려던 주님의 애타는 마음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저 하나님과 함께 하세요. 교회에서 살고, 하루에 몇시간을 신앙생활에 쏟는게 아니라, 내가 찾을 때 언제나 가까이 계실 하나님을 단지 인정하고, 힘들 때 마다 나지막히 하나님...’하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함께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최 집사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집사님이 겸손하셔서 말씀하지 않았지만, 예체능계 수능에서는 전국 수석을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최 집사님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동안 최 집사님을 무시하셨던 분들은 회개하고 오늘부터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인내하면 우리에게 오는 복이 많습니다. 인내의 결과가 아름답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내 것으로 받는 큰 성품이 될 수 있습니다. 인내하다 보면 성취감을 맛보게 되니까 삶에 자신감이 생겨요. 그런가 하면 인내는 내면적으로는 우리에게 승리감을 주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참지 못하면 후회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실수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심판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한 신뢰가 스스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참고 나면 잘 참았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럴 때는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우리를 품격있는 사람으로 만들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내는 바로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청소년 시절에 저를 비롯한 제 친구들 모두가 책상 앞이나 잘 보는 책에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고 써 붙였어요. 모두가 인내하려고 하였지만, 모두가 실천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인내란 성령의 열매, 즉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겸손하게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나님께 의지하여야 합니다.

인내에서 최고의 모범을 보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분을 따라갈 때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구할 때 그분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 복을 여러분이 누리시고, 그래서 온전한 성품과 신앙 인격으로 다듬어져 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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