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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누가복음 15:11-32)
최영모 [beryoza]   2019-08-25 오후 7:20:54 218

오늘 설교까지 포함하여 교회당에 있는 세 개의 그림의 배경에 대하여 모두 설교하였습니다. 익숙하게 아는 내용이기에 설교는 더욱 어려운 것을 다시 느낀다.


탕자의 귀향(누가복음 15:11-32)

우리 교회당에 걸려있는 그림 가운데 반 고흐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렘브란트의 <아브라함의 번제>에 이어 오늘은 렘브란트의 그림인 <탕자의 귀향>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이 그림은 여러분이 2층 예배당으로 올라오실 때 바로 눈에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물론 원본은 에르미타쥐 미술관에서 보실 수 있고요.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불효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모두에게 각자의 재산을 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받은 작은아들은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간섭할 수 없는 곳으로 간 것은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 자기의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 아버지를 떠났던 작은아들은 분명히 탕자였습니다.

아들은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행복할 것 같았지만,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아들은 남의 집에 가서 돼지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음식이라도 먹으려고 하였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세요.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작은아들의 머리는 삭발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옷은 누더기이며,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고, 그나마 신을 신고 있는 오른발도 다 닳았어요. 아버지를 떠나서 살았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비극이었던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의 영적인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삶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 17절에서는 아버지를 떠나서 살다가 돌아설 때 작은아들의 상황을 제정신이 들어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회개에는 지, , 의가 다 필요합니다. -잘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팔고 나서,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가슴 아프게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주님께로 돌아서는 의지는 없었어요.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가룟 유다와 마찬가지였어요.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와 달랐던 것은 주님에게로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2. 집을 나간 작은아들만 탕자가 아니라, 집에 남아있던 큰아들 역시 탕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친밀한 것이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면서 잔치를 베풀었지만, 큰아들은 크게 화를 내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큰아들을 책망하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어요. 큰아들에게 소중한 것은 아버지 자체가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이었기에 그 재산을 탕진한 동생이 미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아들이나 작은아들이나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떠나 있었던 탕자였습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은 율법도 잘 알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많았어요. 하지만 잃어버린 자녀에 대한 아픈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어요.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큰아들처럼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여러분이 보시는 방향의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큰아들입니다. 동생이 돌아왔지만, 형의 표정은 매우 냉정하고 쌀쌀맞습니다. 그림에 나타난 형의 손에는 그의 심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오른손은 어둡고 왼손은 밝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오른손이 밝은 왼손을 덮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 지금 어두움이 덮여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교리는 종교가 되어버리고 신앙이 타성에 젖어버리게 되면 우리 역시 큰아들과 같은 탕자가 됩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타인에게는 엄격하다고 한다면 우리 역시 큰아들과 같은 탕자가 됩니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집을 나간 작은아들을 기다리시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아들을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러한 아버지를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오른손은 여성의 손으로, 왼손은 남성의 손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여성은 어머니의 손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남성은 아버지의 손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용서하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공의로 보면 당연히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면 우리를 살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을 때 십자가는 효력이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때 용서는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집을 나간 작은아들이거나, 아니면 집 안에 있었던 큰아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성경은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니다.”(벧전 2:5b) 우리에게 제사장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 사도는 계속 말합니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7a)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의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나 사제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흔히 우리는 축복을 비는 권리를 목사나 사제에게 의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그 권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시작할 때 드리는 어린이를 위한 축복기도를 다음 주일부터는 우리 모두 함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제가 매우 궁금하게 생각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돌아온 작은아들이 옆구리에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왜 이 칼을 차고 있을까?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 먹이로 배를 채우기도 힘들었는데, 왜 이 칼을 팔지 않고 갖고 있었을까?

여러 가지 참고 문헌을 뒤지면서 알게 된 것은 이 칼은 바로 신분을 표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모든 것을 다 팔았지만, 이 작은 칼은 팔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이 칼만큼은 바로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것은 작은아들이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났지만,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는 것이 바로 이 칼이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손과 들릴라>라는 영화를 보면, 고민하는 삼손에게 친구가 이렇게 충고합니다. “등을 돌리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는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식더라도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지 마십시오. 등을 돌리지 않는 것, 즉 하나님과 단절하지는 마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짓고 있는데,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위선이다. 그러니 교회에 그만 나가자그렇게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신앙이 자라는 것 같지도 않더라. 그래서 교회에 그만 나가자그렇게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데도 교회 봉사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러므로 하지 말자그렇게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있더라도, 신앙이 자라는 것 같지 않더라도, 믿음이 없는 것 같더라도 교회 출석하는 일과 봉사하는 일에 등을 돌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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