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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주시는 하나님(에스더기 8:1-8, 15-17)
최영모 [beryoza]   2018-12-09 오후 9:53:00 1259

상을 주시는 하나님(에스더기 8:1-8, 15-17)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한 장로님께서 죽어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반갑게 맞이하면서, 식당으로 안내하셨어요. 마침 옆 테이블에 같은 교회에 다녔던 집사님이 식사하고 있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어요. 그런데 그 집사님에게 천사들이 음식을 갖다 주는데, 아주 극진히 서빙을 하는 거예요. 반찬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로운 반찬을 갖다 주고, 음식이 부족한 것 같으면 와서 더 먹겠느냐고 묻기도 하고요. 그것을 본 장로님은 천국이 역시 좋긴 좋구나. 집사가 저 정도 대접을 받는다면 장로인 나는 더 큰 대접을 받을 거야.’ 하면서 기대를 하였어요.

한참을 기다려도 주문을 받아야 할 천사가 오지 않자 장로님은 천사를 불렀어요. 그러자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장로님들은 셀프서비스라는 거예요.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갖다 먹으라는 것입니다. 장로님이 생각했어요. “나는 집사보다도 더 많이 헌금하고, 집사보다도 더 많이 봉사했는데 이게 뭐야. 지난 주일에 보니까 목사님은 사역 25년이 되었다고 기념패도 받고, 꽃다발이라도 받았지만, 장로인 나는 기념패는 고사하고 꽃다발 하나 못 받았는데, 천국에 와서까지 이러는 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마음이 크게 불편한 채로 장로님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어디 계세요?”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어요. “, 최 목사 말인가? 지금 짜장면 배달 나갔는데, 곧 돌아올 거야.”

유머입니다만, 그러나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은 매우 진지합니다. 주님을 섬겼다는 이유로 이 땅에서 박수갈채를 받은 만큼 천국에서의 상은 적다는 것이지요.

 

성서가 말하는 정의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성서의 그런 정신을 불완전하지만 그나마 지금 가장 가까이 실현하고 있는 나라들이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북유럽국가들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지요. 몇 년 전, 제가 핀란드에서 신나게 자동차를 운전하는데, 경찰차가 저를 세웠습니다. 저에게 다가온 경찰이 속도위반이라고 하면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어요. “직업은 뭐냐? 한 달 월급은 얼마냐? 자녀는 몇 명이고, 그들은 몇 살이냐?” “왜 저런 질문을 하지? 벌금 고지서나 주고 가면 될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알고 보니 저의 소득과 형편에 맞추어 교통위반 벌금의 액수를 정하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우리가 매스컴에서 보듯이, 핀란드에서 노키아 부사장이 차를 운전하면서 50km로 가야 하는 거리에서 75km로 갔습니다. 그리고 낸 벌금액수가 116천 유로(한국 돈으로 18천만 원)이었어요. 한 인터넷 벤처 사업가는 속도위반 벌금으로 85천 유로를 냈고요. 속도위반 했다고 1억이 넘는 돈을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공평함을 추구하는 사회적 정신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속도위반 벌금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액수 50유로로 부과된다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큰 부담이지만, 부자에게는 하찮은 돈이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벌금이 하찮은 것이라면 교통안전이나 질서가 크게 무너질 수 있다는 논리 때문에 그런 법을 만들어 놓았어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공평함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았던 삶의 결과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공평하게 다루신다고 하였습니다. 출세했느냐 실패했느냐로 평가하지 않고, 부자로 살았느냐 가난하게 살았느냐로 평가하지 않고, 많이 배웠느냐 적게 배웠느냐로 평가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로 하나님은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합당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상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좀 유치하지 않습니까? 상에 연연하지 않고 믿어야 좀 고상하지요.”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잘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할 때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잘하도록 격려하시고, 용기를 주시며, 힘을 주시며 상을 주십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적들과 전쟁을 하고 돌아왔지만 언제 그들이 보복하러 올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15:1b)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딤후 4:6-8) 의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상을 받을 것이라고 바울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11:6b)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믿어야 하지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어야 합니다.

 

에스더 8장으로 갑시다. 하만이 사형을 당한 후,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에스더에게 주었습니다. 하만의 모든 재산이 에스더의 이름으로 등기 이전되었고, 에스더는 그 재산을 모르드개가 관리하도록 위임장을 써주었어요. 잠언에는 선한 사람의 유산은 자손 대대로 이어지지만, 죄인의 재산은 의인에게 주려고 쌓은 것이다.”(13:22) 한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만은 많은 재산을 모았어요. 하지만 그 재산은 의인이었던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주려고 모은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상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하만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주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겠지요. “하만이 애써서 모든 재산인데, 하나님께서 다 빼앗아가신다면 나쁜 하나님 아니냐하고요.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악한 사람이 가진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도 하나님의 것이요, 선한 사람이 가진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어요. “부와 존귀가 주님께로부터 나오고, 주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주님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으시니, 사람이 위대하고 강하게 되는 것도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역대상 29:12) 시인이기도 했던 다윗은 자신의 시에서도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24:1)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것을 주고 싶은 자에게 주시고, 주기 싫은 자에게는 그에게 있는 것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신다는 의미예요.

우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믿든지, 아니면 나의 것이라고 믿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내가 모은 재산, 내가 가진 권리, 내가 가진 능력, 내가 가진 지식, 이런 것을 나의 것으로만 알고 있다면 얼른 그 생각을 바꾸세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재산도, 권리도, 지식도, 능력도 잘 쓰도록 관리를 맡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만의 재산과 하만이 끼고 있던 왕의 인장 반지까지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주셨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부와 존귀를 함께 얻게 된 거예요.

 

마침내 하만은 심판을 받았어요.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3장에서 본 것처럼, 1213(이번 주 금요일이네요), 모든 유대인을 죽여도 좋다는 왕의 조서가 제국 방방곡곡에 전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빨리 철회시켜야 합니다.

에스더는 다시 왕 앞에서 엎드려 울면서 간청합니다. 울면서여자의 눈물은 남자를 이기는 무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두 남녀가 서로 죽어라고 싸우다가도 여자가 눈물을 보이면 남자는 슬며시 수그러집니다. 그리고 자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는 거예요. 남자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지만, 여자의 눈물에 넘어갑니다. 그래서 러시아 속담에는 현명한 사람들은 여자의 눈물을 그냥 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였어요. 하지만 그 속담을 100% 믿고서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그냥 물로만 보아도 크게 당하는 수가 있어요. 남자가 100마디의 말로 회중을 설득하고 있는데, 여자는 눈물 한 번 보임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도 있거든요. 어쨌든 에스더는 바로 이 눈물의 위력을 알고 활용하고 있습니다. 똑똑한 거지요.

에스더가 똑똑한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왕에게 어떻게 간청을 하는지 보세요. “내가 임금님께 은혜를 입었고, 임금님께서 나를 귀엽게 보시고, 내 말이 임금님께서 들으시기에 옳다고 생각하시면. 임금님께서 나를 사랑스럽게 생각하시면하면서 간청을 합니다.

5장에서 왕과 하만을 잔치에 초청할 때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임금님께 은혜를 입게 되어 임금님께서 기꺼이 나의 간청을 들어주시고, 나의 소청을 받아 주시겠다면그리고 7장에서 왕에게 하만을 일러바칠 때는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임금님께 은혜를 입었고, 임금님께서 나를 어여삐 여기시면하면서 요청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임금님께 은혜를 입었고, 임금님께서 나를 귀엽게 보시고, 내 말이 임금님께서 들으시기에 옳다고 생각하시면. 임금님께서 나를 사랑스럽게 생각하시면하고 말합니다. 그때보다 두 배나 더 정중하게 말하고 있어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조서를 철회하는 것은 국법이 걸린 문제입니다. 왕이 한 번 내린 조서는 철회될 수 없다는 것이 페르시아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수에로 왕으로서도 조서를 철회하는 것은 난감할 수 있거든요. 왕으로서 처리하기 곤란한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에스더는 최대한 정중함을 갖추어 요청하고 있어요.

여자의 눈물과 최대한 예의를 갖춘 아내의 정중한 간청에 아하수에로 왕은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말합니다. “왕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유리한 조서를 쓰고, 내 인장 반지로 도장을 찍으면 되잖아.” 이미 반포된 조서는 그대로 두고, 새로운 조서를 하나 더 써서 다시 반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조서가 만들어지고, 제국 전 지역에 전달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조서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다른 민족이 유대인을 공격하면 유대인들은 거기에 맞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자식들과 아내도 죽이고, 그들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도 된다. , 이런 일은 1213일 하루만 해야 한다.’ 하루만 하라는 것은 다른 민족이 유대인을 죽이려고 한 날도 1213일 하루였기 때문입니다.

 

하만이 조서를 보낸 날에 모르드개가 입은 옷은 굵은 베 옷, 즉 장례복이었습니다. 머리에는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조서를 보낸 날에 모르드개가 입은 옷은 보라색과 흰색으로 된 궁중 예복이었고, 겉에는 고운 모시로 짠 귀한 옷이었습니다. 머리에는 재가 아니라 금관을 썼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은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해주시는 분입니다(61:3).

하만이 조서를 보낼 때는 수산 성은 술렁거리며, 어수선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조서를 보낼 때는 수산 성에서는 즐거운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15절에는 즐겁다는 말이 나옵니다. 16절에는 기쁘고 즐겁고 자랑스럽다는 말이 나옵니다. 17절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주셨고, 그 결과는 기쁨이요 즐거움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삶에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셨지요,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살전 5:16). 일이 잘될 때만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고 안될 때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일이 잘 안될 때를 더 많이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일이 잘 되면 기뻐하지 말라고 해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일이 안 될 때도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모든 것이 다 좋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병든 것도 좋은 것이고, 고난도 좋은 것이며, 실패도 좋은 거예요. 나쁘고 좋은 것은 없고, 단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삶이나 인격에는 늘 기쁨과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삶에 기쁨이 없고, 우울하며, 영혼이 낙담하여 있다고 한다면 무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럴 때는 진지하게 우리의 문제를 내놓고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제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면서 물어야만 합니다.

 

서방 교회에 겸손과 자비와 청빈의 수도자였던 성 프란치스코가 있었지요. 우리 한국에도 프란치스코와 버금간다고 할 수 있는 이현필 선생 같은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수도원 생활을 하셨는데, 많은 신비로운 체험을 하였지만 일체 그런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경만 가르쳤어요.

누가 아프다고 기도라도 해달라고 하면 나는 신이 아닙니다.” 하면서, 오히려 아프다는 사람에게 아프게, 더 아프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하신 분입니다. 하루에 한 끼만 식사하였고, 짚신만 신은 채 아무리 추워도 맨발로 다니면서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이분은 생을 마감하기 전, 후두결핵으로 고생을 하셨는데, 숨이 넘어가기 전에도 , 기쁘다. 기뻐. 오메 못참겠네. 아이고 기뻐.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 나가서 외치고 싶다.” 하셨어요. 그러다가 호흡이 가빠지면 잠시 쉬었다가 좀 괜찮아지면 다시금 , 기쁘다. 너무 기쁘다.”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세요.” 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온몸으로 느끼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기뻐하라는 말은 실없이 히죽거리며 웃고 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자신의 내면에 기쁨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에 대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삶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하지만 단순히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넘어서서 그 기쁨이 더 커지고, 그 즐거움이 더 넘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는 예수님의 기쁨까지 함께 누리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요한복음 15:11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게 되면 그분의 기쁨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작가 C. S. 루이스는 주님 그 자체가 기쁨의 본질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바로 기쁨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주님 옆에 있으면 바로 기쁨 옆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예수님과 매우 친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친해지게 되면 이현필 선생처럼 아파서 죽어가면서도 오메 좋은 거, 오메 기쁜 거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예수 믿으면 주일에 놀러 가지도 못하고 교회에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고달프잖아요.’ 하실 분도 있을지 몰라요. 네덜란드의 한 대학교에서 남녀학생 4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여자와 대화를 할 때 남자의 뇌의 지능이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한 실험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매우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대화를 할 때 남자들에게 주소를 물어보니까 주소를 잘 기억하지 못하더래요. 그 이유는 여자의 아름다움에 끌려 남자의 뇌에서는 모든 에너지가 빠지면서 순간적으로 기억력이 멈추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에도 이렇게 기억력이 멈출 정도라면, 주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한 사람은 어떨까요? 그런 사람에게는 주일에 놀러 가고 싶은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 해 전에 일간신문에 <광수생각>이라는 짧은 만화가 연재된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기억을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아름다워서 그런 것은 아니고, 오래전이라서 그런 건데), 만화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어요. 그 남자는 야구도 좋아하지 않았고, 아이스크림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야구도 좋아하고, 아이스크림도 좋아했어요. 그러다 보니 그 남자도 야구장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좋아하게 되더라는 그런 내용이었어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이 싫어지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네덜란드 대학교에서 실험할 때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좀 달랐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볼 때 외모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저 인간이 나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나에게 친절한 남자일까 하는 것도 함께 생각하기에 이런 것을 종합하여 보면서 마음을 뺏긴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상 중에서 최고의 상은 예수 그리스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상을 누려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워할 일만 남았습니다. 예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기에 기뻐합니다. 예수 때문에 우리가 더 나은 인격으로 변화될 수 있기에 기뻐합니다. 예수 때문에 우리 생의 마지막이 happy ending이기에 기뻐합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 때문에 우리는 기뻐합니다. 이 기쁨의 본질을 체험한 사람은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로 행복한 것입니다.

시편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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