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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렉, 하만, 그리고 육체(에스더기 3:1, 출애굽기 17:8-16)
최영모 [beryoza]   2018-08-26 오후 6:43:35 1545

아말렉, 하만, 그리고 육체(에스더기 3:1, 출애굽기 17:8-16)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할 때 분위기를 바꾸는 멘트가 있어요. ‘막간을 이용하여라는 말입니다. 막간이라는 말은 막과 막 사이에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오페라나 연극을 할 때 막과 막 사이에는 짧은 휴식을 취하지만, 옛날에는 막과 막 사이에 음악을 들려주거나 짧은 연극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로는 막간을 이용한 연극이 본 연극보다 더 히트한 적도 많았다고 해요.

오늘은 원래 순서대로 하면 에스더기 3막을 해야 맞는데, 막간을 이용하여 에스더기를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에스더기에는 하나님의 택한 민족 유대인들을 죽이려는 하만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만과 모르드개와 대립하고, 하만과 에스더가 갈등하는 데, 하만의 정체가 무엇인지, 하만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오늘의 내용이 좀 어려울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고민과 기도를 하였어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노력도 했어요. 혹시 오늘은 이해가 안 되더라도, 훗날 이 주제가 필요할 때는 기억이 나면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구약성서에서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일들, 그리고 그 결과들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많아요.

하나만 예로 든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자 불 뱀들이 나와서 그들을 물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긴 장대 끝에 구리 뱀을 달아놓고 누구든지 장대 끝에 매달린 불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당신 자신도 구리 뱀처럼 십자가에 달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만 보아도 낫는 것처럼,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만 보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이렇게 구약성서는 미래를 내다보도록 하였고, 신약성서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 용어로 표현하면 이러한 성서해석을 예표론이라고 합니다. 예표, 미리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에스더기 31절은 하만을 소개하는데,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이라고 하였어요. 에스더기에 등장하는 하만은 아각의 후손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각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아말렉 왕의 칭호입니다. 마치 이집트의 왕들을 파라오(바로)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각의 후손이라는 말은 하만이 아말렉 왕족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선 아말렉에 대하여 알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첫 번째로 아말렉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전쟁에 나가 직접 싸우는 사람은 여호수아이고,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두 팔을 듭니다. 특이한 것은 모세가 팔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팔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한 거예요. 무슨 의미일까요? 아말렉과의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거예요. 마침내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은 대대로 아말렉과 싸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모세가 팔을 들고 기도했더니 이스라엘이 이겼구나이렇게만 생각하면서, 그다음 부분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겠다고 결론처럼 하시는 말씀을 잘 보지 못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아말렉과의 전쟁을 책에 기록해두라고 하셨습니다. 아말렉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아말렉을 잊지도 않고, 대대로 싸우겠다고 하셨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아말렉은 단순히 한 민족의 의미를 넘어서서, 육체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하고 싸우시겠다는 것은 육체하고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은 그런 욕망과 싸우시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육체란 타락한 인간 안에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 없이 내 힘으로 하겠다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도 필요 없으며, 오직 내가 판단해서 하겠다고 할 때 그런 것을 육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옛사람이라고도 하고, ‘육체라고도 하는 본성이 남아있습니다. 이런 것을 내버리는 일이 쉽지 않아요.

 

그럼 아말렉이 육체를 상징한다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면 답이 보입니다(25:29-34).

에서와 야곱은 형제입니다. 한 번은 야곱이 집에서 죽을 끓이고 있는데,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배가 매우 고팠어요. 그래서 야곱에게 그 죽 좀 먹자. 배고파 죽겠다.”라고 했어요. 야곱이 대답합니다. “형이 가진 맏아들의 권리를 먼저 내게 판다면 죽을 줄게.” 에서가 말합니다. “배고파 돌아가시겠는데, 맏아들의 권리가 뭐 밥 먹여 주냐?” 그러면서 야곱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판다고 맹세하고선 죽을 먹고 나갔어요. 맏아들의 권리를 하찮게 여긴 거예요.

그런데 이 맏아들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바울이 갈라디아서 31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맏아들의 권리란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다시금 회복한다는 복음이 맏아들의 권리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맏아들의 권리를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관심이 없다, 나는 예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내용을 읽을 때, 저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어요.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안 넘어가는 사람 없다고 하잖아요. 에서가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죽을 얻어먹기 위해 맏아들의 권리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하더라도, 죽을 먹고 나가면서 꼭 한마디만 하고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야곱아, 아까는 배가 너무 고파 맏아들의 권리를 넘기겠다고 맹세했는데, 그거 농담이다. 어떻게 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팔겠니? 대신 다음에 내가 크게 한 번 쏠게.” 이 말 한마디를 하고 갔으면 운명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그러나 에서는 하찮게 여겼고, 그래서 그는 육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되었어요.

 

예언자 말라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에서를 미워하였다.”(9:13) 왜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미워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겐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나는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과는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안 하십니다.

또한, 에서를 미워하신다고 할 때 에서의 민족까지 말하는데, 그 민족이 에돔 족속이었고,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에서의 손자가 아말렉이기 때문입니다(36:12), 육체를 상징하는 에서의 혈통이 지금 에돔과 아말렉으로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에돔과 아말렉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민족이 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대대로 싸우시겠다는 거예요.

 

말라기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데, 그 책에서 하나님은 에서에게 영원한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에서의 자손인  에돔이, ‘비록 우리가 쓰러졌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세우겠다하고 장담하지만,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세울 테면 세워 보라고 하여라. 내가 기어이 헐어 버리겠다. ‘악한 나라, 주에게 영원히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불릴 것이다.”(1:4) 무서운 말씀 아닌가요? 출애굽기에서 말라기까지의 천 년이 넘는 그 긴 세월 동안, 에서와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대로 싸우겠다는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에서와 아말렉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른 채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는 하나님도 뒤끝 작렬이시네. 그 옛날 좀 괴롭혔다고 두고두고 그것을 끄집어내면서 저주하시는군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와 아말렉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품이기에 하나님은 끝까지 저주하며, 싸우시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이처럼 우리와 원수가 되는데, 아말렉이 우리의 원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입니다(삼상 15:1-26).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한 일 때문에 내가 아말렉을 벌하겠다. 가서 그들을 모조리 전멸시켜라. 사정을 봐주지 말고,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등 무엇이든지 가리지 말고 모두 죽여라.”

구약성경을 읽을 때 모조리 다 죽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보면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기 쉬워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을 먼저 영적이고 상징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의 본성을 모두 거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과 함께 공존하실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해석해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아말렉 민족은 살아있는 아이를 죽여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그런 나쁜 풍습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골짜기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습격하여 괴롭히는 민족이었어요.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그런 문화를 따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격리하는 방법이 바로 모조리 죽이라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말렉을 쳐부수기는 하였지만,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였습니다. 사울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 ‘내가 아각 왕을 사로잡아 간다면 백성들이나 이웃 나라의 다른 왕들은 모두 나를 존경할 거야.’

하나님은 소와 양, 낙타와 나귀 등 아말렉 사람의 모든 소유를 다 없애라고 명령하셨는데, 사울은 품종이 좋은 것들, 값이 나갈만한 것들은 죽이지 않고 가져왔습니다. 사울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 ‘이 재산의 가치는 대단해.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지. 죽이지 않고 갖고 간다면 나는 큰 부자가 될 거야.’

 

그러나 순종하지 않은 결과는 매우 비참하였습니다. 이 사건 직후에 예언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와서 묻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소?” 사울 왕의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죽이라고는 하셨지만 내가 생각해보니까좋은 것들은 가져와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다 갖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는 하나님께 드릴 거예요.”

사울 왕의 대답이 혹시 진심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하시며,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실 정도라면 하나님은 육체라는 원수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짐작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사울 왕의 사건 이후 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아말렉은 다시 등장합니다. 에스더기에서 아말렉 왕 아각의 후손인 하만이 유대인을 모조리 없애버리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입니다. 하만 때문에 유대인들은 굉장한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이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아각 왕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살려주었던 아각 왕의 후손이 500년 후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을 육체가 죽이거나 망가지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 에스더기의 주제입니다.

 

아말렉은 구약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에스더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또다시 500년이 흐른 후, 예수님이 탄생하십니다. 그때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함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헤롯왕이 바로 에서의 후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려고 하였어요. 복음서에서 헤롯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헤롯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는 야고보를 죽였고, 베드로까지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육체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후, 천국을 향하여 가는 믿음의 여정에서 육체는 늘 우리를 방해하고, 괴롭히며, 넘어지게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이러한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이라고 했어요.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8:6-7).

사도 바울은 육체가 만들어내는 행실들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읽을게요. ‘사랑 없이 되풀이되는 값싼 섹스, 악취를 풍기며 쌓이는 정신과 감정의 쓰레기, 과도하게 집착하지만 기쁨 없는 행복, 껍데기 우상들, 마술쇼 같은 종교, 편집증적 외로움, 살벌한 경쟁, 모든 것을 집어삼키지만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잔인한 기질,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받을 줄도 모르는 무력감, 찢겨진 가정과 찢어진 삶, 편협한 마음과 왜곡된 추구, 모든 사람을 경쟁자로 여기는 악한 습관, 통제되지도 않고 통제할 수도 없는 중독, 이름뿐인 꼴사나운 공동체.’(5:19-21)

사도 베드로는 육체가 만들어내는 행실을 포괄적으로 압축하여 악의와 위선, 시기와 낙담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2:1).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다른 한 손에는 육체에 속한 욕심을 붙들고는 결코 믿음의 길을 제대로 갈 수가 없어요. 이런 사람은 차를 타는데 한 발은 차에 올려놓고, 다른 한 발은 땅에 내려놓은 채 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이길 방법은 없을까요? 조용한 곳에서 홀로 수도 생활을 하면 해결이 될까요?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육체의 욕망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사도 바울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지만. 성령으로 몸의 행실(육체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8:13). 성령으로 한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볼링을 잘 치고 싶어서 열심히 연습하였습니다. 그런데 실력이 늘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프로볼링 선수를 만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볼링공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하여 몸의 자세와 힘을 빼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어느 때 숏훅을 해야 하고 어느 때는 롱훅을 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숏훅, 롱훅? 뭔지 모르시죠? 몰라도 돼요. 그냥 넘어가세요. 그런데 그렇게 전문가의 지도를 받고 나니 볼링이 훨씬 잘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다는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전문가인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육신을 이기고,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2주 전에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2주 동안 아침에 눈을 뜨면 성령님, 오늘도 제가 순종하도록 도와주세요. 저에게 말씀하실 때 제가 알아듣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기도해보시라고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아침엔 뭘 해 먹지?’ 그런 생각부터 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식사 기도를 성령님, 제가 순종하도록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보시라고 했죠? 여러분을 민망하게 하고 싶지 않기에 실천하셨는지를 물어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하여 가장 초보적인 단계는 성령님에게 순종하겠다는 기도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초보적인 단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에서와 아말렉과 아각과 하만은 육체로 상징됩니다. 옛사람이나 육체,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성령과 원수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육체와는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님에게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해요. 순종할 의지도 없으면서, ‘도와주세요하는 것은 말짱 도루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에게 순종할 의지가 있다면 성령님은 우리가 죄를 이기고, 육체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도록 우리 대신 싸워주십니다. 이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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